[청사초롱-이대영] 위키리크스라는 사회드라마

입력 2010-12-13 18:00


“과학기술은 인문예술과 종교의 도움을 받아 겸손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야”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미국의 비밀외교문서들을 공개하는 바람에 세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이 사건이 워터게이트 사건처럼 한 나라에만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가라앉을지, 지구촌 전체를 늪에 빠트리는 거대한 사건으로 발전할 것인지 예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이것을 작은 사회드라마로 해석해 보자. 인간의 공동체 생활은 언제든 갈등을 야기한다. 개인 간의 소소한 갈등은 법테두리 내에서 해결되지만 범사회적인 갈등은 법의 한계를 넘어 혁명이나 전쟁, 경제대공황, 폭동과 학살 등의 역사적 사건으로 비화된다. 이것을 인류학자 빅터 터너가 ‘사회드라마(social drama)’로 정의했다.

사회드라마는 갈등이 증폭되던 와중에 아주 작은 사건이 뇌관이 되어 기존의 권력질서와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으로 비화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러하다. 즉, 사회드라마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치 군사적 환경, 국민들의 의식수준, 신기술의 등장, 가치질서의 대전환 등 공동체를 둘러싼 사회적 프레임이 총체적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사회드라마는 크게 위반, 위기, 교정의 3단계로 전개되는데 대개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공적 위반(public breach)’에서 시작된다. 기존 권력에 도전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해당 법규를 파괴하거나 위반하면서 출발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적당한 부화기를 거쳐 임계점에 이르면 공동체가 급속히 파열한다. 그럼 두 번째 단계인 위기(crisis)로 치닫는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극도의 갈등과 대립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위기가 극대화 되면 3단계의 교정(redress)단계로 진입한다. 공동체의 공멸을 우려하는 교정기관들이 나선다. 즉 입법자, 행정관리, 재판관, 성직자 등 사회각계원로들이 앞장서 조각난 사회를 꿰매기 시작한다. 사회드라마의 대단원은 경쟁 집단 간에 화해하거나, 출애굽기처럼(최초의 사회드라마라고 부르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여 해당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를 되찾는 것으로 끝난다.

개인이 그렇듯 사회공동체도 지난한 통과의례를 겪으며 성장한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6·25전쟁이나 4·19혁명, 혹은 5·18민주화운동, 6·10시민항쟁과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개인이 그렇듯 사회도 통과의례를 잘못 거치면 파멸에 이른다.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히틀러의 나치즘과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은 크나큰 해악을 끼친 사회드라마다.

다시 위키리크스 사건으로 돌아가자. 국가든 개인이든 사생활 보호와 국민의 알 권리는 늘 충돌한다. 사이버 해킹을 중대범죄행위로 보느냐, 공공의 알 권리를 위해 인정하느냐가 관건이다. 본 사건의 처리 여하에 따라서 역사의 시계추는 달라진다. 지구촌공동체가 향후 나아갈 사이버 윤리의식과 행동지표가 결정되고, 사회드라마로 성장할 씨앗이 잉태된다.

다만 사이버 해킹 범죄는 현실 속의 도둑질과는 차원이 다르다. 해킹된 정보는 진위를 떠나 비트(bits)방식으로 무한 복제되어 배포되므로 어디엔가 잠복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 언제든 제2, 제3의 피해자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에게 인격이 있듯이 사회와 국가도 각각의 격이 있다. 개인이든 국가든 사적 영역을 해킹이라는 좋지 않은 방법으로 훔쳐내 이를 마치 공공의 알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해킹’을 정상적인 정보취득행위로 본다면 사회는 급속히 병들어가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위키리크스의 정보를 받아 게재한 해당 언론사에 주는 사회적 경고이기도 하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과학기술의 시대다. 과학과 신기술은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인문예술 그리고 종교를 친구 삼아 겸손하게 길을 걸어야 한다. 야만의 피의 축제는 언제 어디서든 자극적이고도 거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 강도의 칼과 의사의 칼이 다르듯 휴머니즘이 없는 과학은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앞당길 뿐이다.



이대영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