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 고종 어사진에 얽힌 비화 펴내
입력 2010-12-13 21:07
고종은 실제의 ‘얼굴’을 남긴 우리나라 최초의 왕이다. 1880년대 들어 조선에 사진술이 도입돼 고종과 왕실 일가가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은 ‘고종, 어사진을 통해 세계를 꿈꾸다’(문현·사진)를 통해 고종 어사진에 얽힌 여러 비화와 뒷이야기를 찾아냈다.
고종이 찍은 첫 사진은 무엇일까? 고종의 측근이었던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1884년 3월 10일(음력 2월 13일)과 13일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13일에 지운영(지석영의 형)이 임금과 세자(후의 순종)를 촬영한 사실을 적어놓은 바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무엇이 10일에 찍은 것이고 무엇이 13일에 찍은 것인지, 지운영의 사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최 소장은 현재 남아 있는 고종의 어사진들을 면밀히 분석, 같은 장소에서 촬영을 재연하는 방법을 통해 로웰과 지운영 사진의 차이점을 밝혀내고 로웰이 최초로 고종을 찍은 사진과 지운영이 찍은 사진을 책에 공개했다. 조선식 어진(御眞) 문화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로웰이 찍은 사진은 근거리에서 고종의 전신을 중심으로 찍은 지운영 사진과는 달리 창덕궁 농수정의 전경 전체를 잡아냈다.
로웰과 지운영이 어떤 경로로 고종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도 관심거리. 최 소장은 윤치호의 일기를 통해 그 해 3월 5일(음력 2월 8일)이 세자의 열 번째 생일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세자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아들(다른 아이들이 태어나긴 했지만 대부분 금방 죽었다)로 생일을 맞아 새로운 과거까지 치러질 정도였던 국가의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이 때 사진을 촬영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은 사진을 언제 받아볼 수 있었을까. 종로에 사진국을 개설하고 있던 지운영은 7일 후 사진을 인화해 왕실에 전달했다. 1900년대 웬만한 사진관에서도 사진 인화에 10∼15일 정도 걸렸음을 감안하면 지운영이 어사진 현상에 특별히 신경썼던 것을 알 수 있다.
“곤전(명성황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동궁 야야(도련님)의 어진을 보았느냐’고 하였다. (중략) 인하여 어진을 보고 물러나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3월 19일자 윤치호의 일기 중 일부로, 사진이란 신문물을 처음 받아 보았던 왕실 가족들의 기쁨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로웰은 촬영 후 일본으로 출국해 사진 전달도 자연 늦어졌다. 로웰은 그 해 8월 27일 일본에 있으면서 사진첩을 윤치호에게 보냈고, 윤치호가 이를 왕실에 전달했다.
명성황후 국상 당시 상복을 입고 찍은 왕의 사진도 눈길을 끈다. 그간 이 사진이 찍힌 시점은 분명치 않았으나 저자는 여러 사료를 분석해 L B 그래험 미국 공사 부인이 찍은 국상 때의 사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명성황후 국상은 시해 2년 뒤인 1897년 11월 22일 거행됐고, 당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고종과 그의 가족들은 일평생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이같은 사진들은 베일에 싸인 왕의 얼굴이 민중에 공개되는 외세의 또다른 기술이었던 것이다. 왜곡된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던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양인들에게 알리는 데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