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초엽 ‘여행 안내서 사진에 나타난 한국 이미지의 표상’은
입력 2010-12-13 17:36
대통령이 출연하는 한국 관광 홍보 영상에도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말이 등장한 걸 근거로 ‘한국의 이미지는 역동적이고 현대적이다’라고 말한다면 옳은가. 홍보라는 것이 실제의 진실보다는 진실이기를 원하는 것의 반영이라면 ‘한국은 역동적이며 현대적이고 싶어 한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근대 초엽의 한국 관광 홍보 자료를 보면 이런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한국을 관광지로 만들고 홍보하는 작업을 한국이 아닌 일본이 시작했기 때문에 현대를 사는 우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맥락에서 국제사회를 향한 한국의 첫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지난 9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열린 정기 콜로퀴엄에서 미국 산타바바라대 배형일 교수는 ‘여행안내서 사진에 나타난 한국 이미지의 표상 : 근대 관광산업의 탄생과 고적명소지 선전(宣傳)’이란 제목의 주제발표에서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한국의 이미지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조명했다.
여행이 한가로운 유람이 아니었던 시절, 타국행은 임금의 명을 받든 사행길이거나 생업을 위한 위험한 여정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관광은 철저히 근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배 교수에 따르면, 관광·여행지로서 한국이 처음 주목받게 된 것은 일본이 기념엽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며 종군기자들이 찍은 전쟁사진들이 엽서로 제작돼 일본 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 열풍에 힘입어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이 ‘위대한 전쟁’의 현장을 견학하는 상품을 기획해 관광객을 모집했고, 3일 만에 매진됐다는 것이다. 현재의 패키지 투어를 연상케 하는 이 상품은 저렴한 해외 단체관광의 시초이기도 했다.
1912년에는 일본교통공사(JTB)가 창설되고 곧 조선에 진출했다. 이를 기점으로 철도를 이용한 관광산업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일반인의 것이 아니었던 당시, 여행 코스도 부산에서 신의주 종점까지 간 뒤 러시아나 중국행 열차로 갈아타는 ‘만선(만주·조선)’과 신라·백제 유적지 등으로 다양했다. 1916년에는 고적조사위원회가 설치되고 ‘고적급 유물보존규칙’까지 공포돼 식민지 조선의 역사유물을 관장하게 됐다.
그렇다면 일본은 한국의 무엇을 팔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낙후된 전통의 나라’라는 이미지다. 배 교수는 근대 문명이나 한국의 발전을 연상할 수 있는 요소는 ‘관광 조선’의 홍보에서 철저히 빠졌다고 지적한다. 선택된 관광지는 전근대의 사찰과 왕릉, 궁궐의 정원, 농촌 풍경이나 자연 등이었다. 오래된 역사와 유적은 강조된 데 반해 현재의 모습은 정체되고 후진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고찰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림엽서나 풍속 사진 등인데, 현존하는 자료들을 살펴보면 엽서나 사진에는 왕릉 등의 ‘전근대적’ 관광 상품이나 기생 혹은 어린이들이 주로 등장했다. 일본이 이식한 자본주의의 산물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속속 들어오고 있었지만, 이는 철저히 무시됐다. 근대적인 것이라면 건물 한 채조차 담기지 않았던 건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는 스스로 동양인이면서도 탈아입구(脫亞入歐)하며 ‘동양 속의 서양인’, 곧 근대인임을 자처했던 일본인들의 변형된 오리엔탈리즘을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빨래하는 아낙, 한가롭게 앉아 담배를 피우는 양반, 춤추는 기생, 힘든 지게꾼…. 만들어진 조선의 이미지는 수천년 동안의 고대가 그대로 머무른 후진국, 혹은 평화와 어린이가 공존하는 지상 낙원이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합리적이면서 현대적인 일본’과는 철저히 대비됐다.
배 교수는 “이 같은 조선의 이미지는 선전용 포스터나 그림엽서라는 당시의 매스미디어를 통해 세계 방방곡곡에 다량 유통되면서 더욱더 강화됐다”고 말한다.
조선을 다룬 엽서나 포스터, 사진 등에는 심지어 일본인이나 관광객조차 비치지 않았다. 왕조가 아직 사멸하기 전인 1908년 창경궁에 동·식물원을 설치하고, 이왕가박물관을 만든 것은 같은 맥락에서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런 대비는 개화기 조선 땅을 밟은 소수의 서양인들이 ‘조선인은 게으르다’, ‘부정 부패가 만연하다’, ‘일하지 않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등 편견에 가득 찬 기록을 남긴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이 조선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원했던 수익은 외화 유치와 투자 확대 정도였을 테지만, ‘후진국 조선’에 남겨진 상흔은 그 이상으로 깊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