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4) 페스탈로치 전기 읽고 사회사업가 꿈꿔
입력 2010-12-13 17:54
내 아명은 보라(保羅·바울의 한자 이름)였다.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만큼 가족과 친지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목사로 살아갈 것을 기대하셨고, 나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인천에 있을 때 소년소녀 잡지에서 스위스의 교육가인 페스탈로치의 짧은 전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때가 아마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페스탈로치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게 다가왔다. ‘아, 이 사람은 정말 특별하게 산 사람이구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일하신 분이구나. 나도 페스탈로치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 전기를 읽고 어린 마음에 주제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마음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대학에 입학할 때도 바뀌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전공을 택해야 할 때였다. 페스탈로치는 교육자이면서 사회사업가, 사회개혁가이기도 한데 그런 공부를 어디서 할 수 있을까 찾아봤다.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생각했다. 당시 서울대엔 교육학과가 사범대에 속해 있었다. 교육학과가 사범대에 있다는 것이 페스탈로치가 되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단순히 중·고등학교 선생을 배출하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사범대학은 왠지 좀 비좁은 것 같고, 거기다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생각도 사범대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했다.
내 관심을 광범위하게 확장시킬 수 있고 또 인접한 다른 인문학과 소통하면서 내 관심세계를 넓힐 수 있고 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연세대는 기독교 학교인데다가 교육학과가 문과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내가 입학할 때는 학과별 모집이 아니고 요즘 식으로 하면 문과 계열별 모집이었다. 입학해서 2학년 될 때까지 자기가 자유롭게 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56년 연세대 교육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당시 연세대엔 기독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특히 내가 다녔던 문과대는 기독교의 봉사정신이 주류였다. 난 학생 자치조직인 사회사업회에 소속돼 활동했다. 페스탈로치 같은 목회자가 되려면 사회사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학년 2학기 때는 내가 회장이 됐다. 농촌계몽을 한답시고 시골 개울을 정비하거나 우물 파는 일을 도왔다. 여학생들은 농촌 여성들과 대화를 하고, 채플 시간엔 특별연보도 해서 고아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는 무용단과 합창단을 만들어 강원도 화천 같은 군부대에 가서 군인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는 ‘어떻게 바깥의 사람들, 이웃들에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페스탈로치 같은 목사가 되려면 신학교를 가야 하는데, 학부 공부만 가지고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교육학과 외의 철학, 문학, 신학 수업을 청강했다. 그래도 부족하니까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무시험이었던 학부와 달리 대학원은 필답시험이 있었다. 대학 4학년 때는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킬 패트릭의 ‘교육철학’ 원서를 사서 모르는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외웠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