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약국(80)

입력 2010-12-13 08:35

長壽사회, 노령화 사회

훌륭한 신문기사를 쓰려면 성서와 셰익스피어와 디킨즈를 읽어야 한다. 즉 간결한 문체를 배우기 위해서는 성서를, 풍부한 어휘를 얻기 위해서는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사물 묘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디킨즈를….

맥루한인가, 정확하지 않지만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서가 지니는 수사학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라 할 수 있지요. 어떤 심심한 사람이 성서를 뒤적이면서 [지옥]이라는 말과 [천국] 이라는 단어를 세어 보았더니 [지옥]은 53번, [천국]은 554번이 나오더래요.

이것은 어떤 함축성을 지니고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지옥]의 공포를 보여 금제(禁制)와 벌로써 인생을 개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천국]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긍정과 꿈으로 옳은 길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하죠. 결국 [지옥] 한 마디에 [천국]이 열 마디씩 나오는 성서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이나 사회나 개인의 주변을 보면 성서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정반대의 현상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을 통한 교훈보다는 [지옥]을 가르치는 설교가 한층 지배적인 이유도 그것이죠. 아이를 기르는 부모도, 여러 사람이 움직일 때도, 거리를 다녀 보아도 [절대 嚴禁] [注意] [금지] 등의 구호와 푯말을 보게 됩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는 수없이 [금지]와 [주의]의 오프 리미트(off limited)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이 이토록 폐문(閉門)의 사고와 오프 리미트(off limited)에 포위되었기 때문에 삶이 항상 스트레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요즘 우리 사회의 연령대를 놓고 말할 때 ‘노령화 사회’라고 합니다. 이것 또한 ‘폐문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래서 언어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면, 우리가 천국의 언어로 바꾸어 불러 보는 게 어떨까요? [장수사회]라고 말입니다. 이왕 부를 바에야 ‘노령화 사회’라는 표현보다는 [장수사회]가 백배 더 아름답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잠 3:2)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