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잃은 자들에 던지는 칼날같은 호통… 이순재·한명구의 연극 ‘돈키호테’
입력 2010-12-12 17:32
‘돈키호테’가 오랫동안 고전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돈키호테의 성격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책을 너무 많이 읽다 어느새 스스로 기사가 됐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그리고 현실을 추구하는 이들이 보기엔 무모할 정도로 신념을 따라 과감한 모험에 나선다.
돈키호테는 오늘날 꿈을 잃은 자들에 대한 각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순수한 이상과 젊음의 패기는 현실에 마모돼 어느새 소멸한다. 순수함을 지키고 사는 게 우스워 보이는 냉혹한 현실에서 돈키호테의 모습은 잃어버린 꿈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 연극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원작을 프랑스 극작가 빅토르앵 사르두가 각색한 것으로 원작에 충실하다. 카르데니오, 루신다, 돈 페르난도, 도로시아 등 네 남녀가 서로 얽히는 사각관계를 형성하고 돈키호테가 이들과 엮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순수한 청년 카데니오는 친구인 돈 페르난도에게 자신의 연인 루신다를 빼앗기고 삶이 붕괴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찰나 만난 돈키호테는 그를 각성시킨다.
돈키호테는 죽고 싶은 마음에 칼을 달라는 카데니오에게 말한다. “문제는 미쳤거나 어리석은 놈한테 칼을 줘도 되는가 하는 거다.(중략) 그 목숨은 자기 게 아니라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나라에게, 신에게 속한 것인데 말이야.”
카데니오가 “누게 제 목숨을 신경이나 쓰겠습니까”라고 절규하자 돈키호테는 또 이렇게 대답한다. “있지. 절망의 절벽에서 나약함과 두려움에 떨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 죽음 앞에서도 결단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축복과 영광을 발아래서 찾지 않고, 가슴에서 찾는 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앞서, 지옥의 문턱에서 마주칠 심판관의 무시무시한 질문을 두려워하는 자!”
“내 너를 신의 기사로 임명하였거늘, 삶의 전투 한가운데서 도망 친 이 비겁한 탈주병아, 저주받을 지어다. 네 놈의 칼. 여기 있다! 받을 테냐?” 깨달음을 카데니오는 돈키호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루신다를 다시 찾겠다고 다짐한다.
돈키호테는 풍차가 거인이라고 생각해 달려들고, 봇짐장수를 변장한 마법사라며 공격하기도 한다. 황당한 기행이 계속 이어지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자신의 신념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자신을 한번쯤 투영할 만 하다.
독창적인 작품 해석과 무대로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극단 여행자의 양정웅 대표는 ‘돈키호테’를 원작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전개한다. 차이가 있다면 3시간에 달하는 원작을 2시간가량으로 줄이고, 돈키호테가 집으로 돌아오는 원작과 달리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마무리 했다는 점이다.
돈키호테 역을 번갈아 맡는 이순재와 한명구는 모두 만족스러운 연기를 선보인다. 이순재의 돈키호테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스러움과 강직함이 도드라져 보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도 배역과 잘 어울렸다.
한명구는 안정적인 연기 위에 돈키호테의 몽상가적인 느낌을 보다 잘 담아냈다.
이밖에 감초 연기를 펼치는 산초 역의 박용수, 여관 주인 오티즈 역을 맡은 정규수의 코믹연기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내년 1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1644-2003).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