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3) 미션스쿨 대구 계성고서 알찬 인생 수업
입력 2010-12-12 17:46
내가 다닌 문경 서중학교는 우리 집 바로 옆이었다. 아주 조그만 중학교였다. 내가 3회 졸업생이니까 신생 학교였던 셈이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6·25가 발발했다. 아버지는 피란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먼저 아셔서 교인들과 주민들에게 알리셨다. 다른 목사들 집안과 함께 피란을 갔다. 포항 울산 등 바닷가에서 몇 개월을 살았다.
전시(戰時)였지만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학교는 다 좋았지만 아주 힘든 경험도 했다. 주일이 되면 꼭 학교로 나오라는 거였다. 풀도 뽑고 청소도 시키기 위해서였다. 난 주일엔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해야 하기에 학교엘 안 나갔다. 친구들 중에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몇 안됐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꼭 빠지니까 요주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훈육주임선생이 몽둥이로 심하게 때리셨다.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서 사친회(학부모회) 회장을 하셨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난 일하는 게 싫어서 학교에 안나간 게 아니고 주일날에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야 되는 집안의 전통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억울한 일을 겪은 것이다. 신앙에 대해 회의는 안했지만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생각은 많이 들었다. 오히려 신앙을 더 바라고 사모하게 됐다.
하지만 대구 계성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많이 달라졌다. 계성학교는 기독교 학교로서 개화를 빨리 했다. 경상도가 개화가 좀 늦다는 얘기를 하는데 계성학교는 그 와중에 근대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앞장섰던 학교다. 선생님들이 교장선생님의 뜻을 따라서 민주식이라고나 할까, 열린 학교를 만드셨다. 반기독교 학교에서 기독교 학교로 극과 극을 오간 것이다. 그 계성고 시절은 지금 돌아봐도 행복한 기억이 많다.
그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여서 서울에서 피란오신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 중엔 대학교수를 하셔야 할 분들이 시국이 불안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분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을 하셨던 이성화 선생님은 얼마 안 있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다. 그런데 그분은 나중에 내가 연세대 3학년 때 교육학과 교수로 오셨다. 고1 때 담임선생님을 대학에서 뵌 것이다. 계성고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셨던 이극찬 선생님은 나중에 연세대 정외과 교수가 되셨다. 영어 선생님 중에도 나중에 영문과 교수로 간 분이 계셨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기에 계성고의 수업 분위기는 마치 대학 같았다. 당시는 고등학교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고, 학생들도 성적순으로 줄 세우지 않았다. 대학도 무조건 서울로 보내지 않았다. 의사나 교사, 농과대 갈 사람도 다 서울로 갈 필요가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내가 그 당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계성고를 간 이유는 기독교 학교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또 다른 조건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 중에 선발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준다는 거였다. ‘나도 열심히 하면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겠구나’ 하고 계성고에 갔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졸업할 당시에는 그만 그 규칙이 바뀌고 말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해서는 미국에 못가고 대학교에서 2학년까지 다녀야만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