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최정욱] 승복 없는 M&A
입력 2010-12-12 17:34
1865년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은 미국 버지니아주 애포매톡스 군청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남북전쟁 초기 전황을 주도한 그에겐 아직 건재한 부대가 곳곳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북군의 진격과 포위공격에 더 이상 희생을 낼 수는 없었다.
진지로 되돌아간 리 장군은 울먹이는 부하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사랑하는 제군, 지금까지 여러분은 나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이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여러분은 훌륭한 군인이었듯 훌륭한 국민이 될 것이다. 여러분과 함께 했던 날들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처절했던 4년간의 전쟁이 깨끗한 승복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진흙탕 싸움이 된 현대건설 인수합병(M&A) 과정을 보면 승복의 미덕이 아쉬워진다. 외환은행 등 현대건설 채권단은 지난달 16일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현대그룹을 선정했다. 당시 현대차그룹도 “채권단이 최선의 판단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공식반응을 내놨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프랑스 나티시스은행 예치금(1조2000억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현대차그룹은 현대그룹과 채권단 측에 인수자금의 성격을 공개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4일엔 정책금융공사 사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증인으로 섰다. M&A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국회가 채권단 측을 부른 것은 이례적이다. 현대차그룹의 막강한 로비력이 작용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채권단과 현대그룹은 대출계약서 제출 등 전례 없는 자금성격 규명 요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가게 주인이 물건을 사러 온 사람에게 돈의 출처 등을 따지라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채권단에 현대그룹과 맺은 양해각서(MOU)도 백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대우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한 금호그룹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환은행에서 자금을 인출하는 등 현대차그룹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난 10일엔 외환은행 실무자들을 고발하고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내겠다고 밝혔다. 현대그룹도 법원에 MOU 해지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현대건설 M&A를 둘러싼 사상 초유의 법정공방이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정상화를 염원하는 다른 기업들의 M&A까지 차질을 빚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경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상대 선수는 물론 심판까지 공격하는 ‘나쁜 사례’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정욱 차장 jw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