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화폭에 옮긴 박물관 유물… 이석우展 ‘박물관에 가면 그림이 그리고 싶다’

입력 2010-12-12 17:25


역사학자인 이석우(69·사진) 경희대 명예교수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목포중학교 시절 미술부에서 활동하면서 3학년 때 전국미술대회 입선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중학교에는 극작가 차범석(2006년 작고)이 국어교사로 재직했고 미술과목은 한국현대미술의 선구자였던 비운의 화가 양수아(1972년 작고)가 맡았으며 동기생 중에는 김지하 시인이 있었다.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 예술적 자양분을 흡수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교육열이 높은 부모의 권유를 저버리지 못해 그는 미술공부를 접고 역사학도가 됐다. 경희대와 미국 애드리안대학, 일리노이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한 뒤 경희대 사학과에서 30여년 동안 후학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을 숨기지 못해 늘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평소 역사와 미술의 연결고리에 관심을 기울여온 그는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 ‘명화로 만나는 성경은 새롭다’ 등 관련 서적을 펴냈다. 2006년 정년퇴임 후에는 서울 가양동 겸재정선미술관 관장을 맡아 조선시대 진경산수화풍을 완성한 정선(1676∼1759)의 예술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50여년 전 예술가를 꿈꾸던 그의 열망이 마침내 전시회로 이어졌다. 오는 15일부터 29일까지 서울 견지동 목인미술관·갤러리에서 ‘박물관에 가면 그림이 그리고 싶다’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연다. 곳곳의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접한 유물들을 드로잉과 수채화로 그린 100여점을 선보인다. 한국박물관 100년의 역사에서 박물관 유물을 소재로 하는 그림 전시회가 열리기는 보기 드문 사례다.

찬란한 금관을 날갯짓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날으는 금관’,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 및 문무백관들의 관복에 새긴 용무늬 등 흉배(胸背)를 황홀한 느낌으로 그린 ‘태양이 떠오르다’,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런 멋을 지닌 ‘반닫이’ 등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고구려 와당’ ‘연화 막새’ ‘항아리’ ‘겸재의 박연폭포에 취해’ 등 작품들도 우리 것에 대한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경희대 중앙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한 이 교수는 “확실치는 않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에 애정을 갖고 드나든 지 꽤 오래인 것 같다. ‘사상계’를 애독하던 시절, ‘라이프’ 사진전 화보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있다”면서 “그곳은 내게 유물이나 미술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곳을 넘어 역사와 문화, 특히 미의 발견, 미의 원형을 찾아가게 하는 살아있는 체험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 낙서같은 그림을 그릴 때, 책을 읽을 때, 그리고 홀로 조용히 앉아 있을 때”라고 밝히는 그는 문화유산을 만나면 습벽처럼 스케치북을 꺼내들어 그림을 그린다. 세월과 함께 쌓인 스케치북이 수십권에 이른다. 이번 전시는 평생 동안 쏟아온 열정을 감동이 있는 그림과 함께 펼쳐 보이는 삶의 흔적이자 기록이다(02-722-5066).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