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되지 않은 강원도 산골 눈을 맛보는 느낌… 김도연 소설집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입력 2010-12-10 17:50
며칠 전 내린 함박눈과 함께 강원도 평창에 살고 있는 소설가 김도연(44·사진)의 소설집 ‘이별전후사의 재인식’(문학동네)이 배달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김도연 하면 강원도 폭설이 생각나는 터에 함박눈 내린 날, 그의 소설집을 만났으니 그의 문발(文發)이 이토록 절기를 맞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표제작의 제목은 작가가 다분히 의도했을 사회과학서 스테디셀러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연상시킨다. 나아가 ‘그녀와 그의 연평해전, 그리고 즐거운 트위스트’라는 부제까지 달고 있다. 이 작품엔 연인 관계인 남녀가 등장하는데 눈치 빠른 독자라면 ‘해방전후사’라는 거시사적 역사의 맥락이 ‘이별전후사’라는 미시사적인 맥락으로 변주되고 있는 소설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두 사람은 1997년에 연애를 접고 서로 헤어진다. 헤어진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난 때문이다. 10년이 지나 재회한 두 사람, 그러니까 2007년 시점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이제 유부남과 유부녀가 되어 있다. 아다시피 1997년과 2007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다. 두 사람은 1997년, 섹스의 와중에서도 ‘누가 대통령이 될까’, 라며 궁금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만난 2007년에도 역시 잠자리에서 대통령 선거에 대한 관심을 표한다.
“정말 이럴 거야! 그는 그녀의 화난 얼굴을 보다가 문득 알았다. 그녀와 그의 만남에 있어 이제 비로소 누가 대통령이 돼도 상관없다는 것을. 마침내 그녀와 그의 기억이 거의 다 타고 있다는 사실을.”(219쪽)
그들의 만남은 재방송된 연속극처럼, 그리고 5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대통령 선거처럼 흥미와 희망의 감수성을 상실한 남녀간의 사랑과 정치 사이의 함수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또다른 수록작 ‘메밀꽃 질 무렵’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후일담 형식을 띠고 있다. 주인공은 죽은 허생원의 아들 동이로, 그 역시 봉평장터에서 신발을 팔고 있는 장돌뱅이 영감이 되어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 허생원과 비슷한 나이를 먹은 동이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오늘의 현실에 불러내고 싶은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늘그막이 되니 마음은 노상 옛날을 서성거린다.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신발이 있다면 주저 없이 그 신발을 신고 돌아갈 것이다. 말끔하게 비운 흰 국수 그릇을 들여다보며 허씨는 고개를 끄덕인다.”(77쪽)
소설집을 읽어나가는 동안 오염되지 않은 강원도 산골의 눈을 맛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소설 속 ‘동이’처럼 흰 국수 그릇을 들여다보며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 있기 때문이다. 수록작 8편의 수준이 모두 고른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