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선 저축은행] 업계 ‘PF 올인’·당국 ‘뒷북’ 합작품
입력 2010-12-09 17:55
(상) 왜 이렇게 됐나
5조원 규모의 국내 최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중 하나인 경기도 판교 알파돔시티. 주상복합아파트, 호텔, 상업·업무시설이 들어서는 이 사업은 착공도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9일 찾아간 알파돔시티 현장은 잡초만 무성할 뿐 공사 안내문조차 없었다. 인근 판교역 공사장에서 일하는 임주호씨는 “올 초부터 공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삽 한번 뜨지 못했다”며 “돈이 없어 시작을 못하고 있는 걸로 안다”고 했다.
사업이 차질을 빚으면서 산업은행 외환은행 롯데건설 등 10개 투자회사는 고심에 빠졌다. PF가 성사되지 않으면 사업 무산은 물론 투자금을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까지 서울 여의도에 호텔, 쇼핑몰, 업무용 빌딩을 세우는 파크원 프로젝트도 상황이 비슷하다. 부동산 경기침체로 돈줄이 마른 데다 땅 주인과 시행사(스카이랜디벨롭먼트) 사이에 소송이 걸리면서 사업은 중단 40여일째다. 지난 4월 1600억원을 대출해준 한신, 남양, 미래 등 저축은행들은 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부동산 PF가 저축은행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한때 ‘황금알 낳는 사업’으로 불리며 고수익을 안겨줬지만 이제는 ‘독약’이 됐다. 저축은행 부실 도미노가 전체 금융권을 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마저 높다. 부랴부랴 금융당국은 부실 정리에 필요한 구조조정 기금을 3조5000억원에서 4조5000억원으로 늘려 달라고 국회에 요청했다. 하지만 뒷북 대응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부실 얼마나 되나=금융당국은 내년 6월 말까지 저축은행의 PF대출 손실액이 최대 1조9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봤다. 지난 6월 말 8.7%였던 저축은행 PF대출 연체율은 이달 말 24.3%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측했다.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 지난 4월 저축은행의 부실 PF 채권 3조8000억원어치를 매입하면서 지난 3월 말 13.7%였던 연체율을 떨어뜨렸지만 반짝 효과에 그친 것이다.
문제는 숨어 있던 부실이 얼마냐에 달렸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현재 저축은행의 PF대출 잔액은 12조4000억원이다. 당국은 최악의 경우 부실 규모가 6조7000억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금융당국은 브리지론에 주목한다. 저축은행의 PF대출 잔액 가운데 브리지론은 69.1%(8조6000억원)를 차지한다. 브리지론은 공사 시작 전에 사업부지 매입 등을 위한 중간 단계의 대출이다. 시행사는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은행으로 PF대출을 갈아타고 브리지론을 갚는다. 금융권 관계자는 “시행사가 은행 등으로부터 돈을 빌리지 못하면 브리지론은 고스란히 부실덩어리가 된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다면 연체율이 70%까지 급등할 수도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왜 부실 커졌나=저축은행 부실은 업계와 정부의 합작품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저축은행은 부동산 PF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저축은행들은 높은 금리를 주면서 유치한 자금을 운용하기 위해 부동산 PF대출에 올인했다. 사업성은 따지지도 않았다. 2003년 카드대란으로 새로운 수익원 창출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도 간접적으로 유도한 측면이 있다.
이후 금융당국은 쏠림 현상을 방치한 채 위기설이 불거지면 “큰 문제 없다”고만 되뇌었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부동산 경기가 직격탄을 맞자 당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전북 최대 저축은행인 전일저축은행의 파산으로 위기가 닥치자 지난 4월 대손충당금 적립요건을 강화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저축은행 업계 관계자는 “위기의 1차 책임은 업계에 있지만 2차 책임은 뒷북으로 일관하는 금융당국에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부동산 경기 하강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정부가 기준을 강화해 대형은행까지 돈줄을 죄고 있다. 시간을 줘 업계가 자율적으로 부실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찬희 강준구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