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정윤희] 사람은 죽어 책을 남기고

입력 2010-12-09 17:48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을 알리듯 함박눈이 하늘 아래 모든 것 위에 쌓였다. 사람이 다닌 눈길은 스르르 녹아 사라졌으나, 하늘을 향해 뻗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만들어낸 설경은 여백과 곡선의 미를 한껏 뽐낸다.

겨울이 되면 이청준 선생의 소설 ‘눈길’이 떠오른다. 나는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 작가의 서재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단편소설 ‘벌레이야기’를 이창동 감독이 영화로 만든 ‘밀양’이 한창 뜨던 2007년 여름이었다. 서재에 소설 ‘눈길’의 이야기를 재연해 놓은 미니어처가 기억에 남는다. ‘눈길’을 회상하며 작가의 고향 남도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난 선생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선생은 책이 출간되면 다음 인터뷰를 하겠노라고 약속하셨는데, 소설집 ‘그 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를 내시고는 약속도 지키지 못한채 2008년에 작고하셨다. 단편 ‘귀향지 없는 항로’에 “내가 아직도 제 소설질 길에선 헤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그것은 아직도 자신을 씻기지 못했음일 것이다. 자신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씻길 바르고 화창한 길을 찾지 못했음일 것이다. 그 삶과 문학에 그렇듯 단단한 신념과 밝은 빛을 얻지 못했음일 것이다”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가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곱씹게 했다.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던 8일, 지난 5일 타계한 리영희 교수가 ‘민주의 성지’ 광주에 영원히 잠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최근작인 ‘대화’는 2005년 문학평론가 임헌영씨와의 대담 형식으로 집필된 자서전인데,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리영희 선생이 구술하고 힘겹게 교정을 거친 후 나왔던 책이다. 기자와 교수로 현대사의 굵직한 사상가로 살아 온 선생의 발자취를 기록한 책도 연이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부고를 접한 다음 날 시내 대형서점에 들렀더니 벌써 선생의 저서들이 독자들의 발을 멈추게 했다. 지난 12월 2일 선생의 생신 때 출간되어 선물로 드렸다는 ‘리영희 평전’도 눈에 들어왔다. 전 독립기념관장이었던 김삼웅 선생이 집필한 평전은 한국 언론사에 한 획을 그은 거목답게 생애와 사상을 조목조목 짚어 냈다.

“지난 한 세월 동안 내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종이)’는 내게 조석으로 배달되어 왔지만 ‘새 소식(신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 왔다.”(443쪽)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고 했듯 당대 거목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육성을 듣지 못하더라도 책이 남는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글귀와 행간 속에 서려 있는 그들의 사상은 마음에 새겨진다.

정윤희 출판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