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본 스포츠 역사] “헝그리 정신은 옛말”… 새 풍속 ‘스포츠 신인류’ 탄생
입력 2010-12-09 17:30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네요”
지난 2월 16일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을 딴 모태범(21·한국체대)은 금메달이 확정된 후에도 여유가 넘쳤다. 태극기를 두르긴 했지만 손가락을 이리저리 찌르는 댄스 세리머니를 펼치며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메달을 따고서도 왜 울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금, 은, 동메달을 모두 따면 그때는 진짜 울겠다”는 당돌한 대답도 했다.
이렇듯 비장함을 거둔 메달리스트의 모습은 어느새 익숙한 모습이 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나 그 이후 스포츠 행사에서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금메달을 딴 기쁨을 대신하던 세대들과 다른 모습이다. ‘헝그리 정신’, ‘애국심’과 같은 심각함을 걷어내고 구김살 없는 당당함을 갖춘 ‘스포츠 신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신인류들은 그동안 한국이 넘보기 힘들었던 종목에서도 세계 정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시합 직전까지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박태환(21·단국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영 금메달리스트가 됐고, 김연아(20·고려대)는 세계선수권 제패에 이어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역시 피겨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이 아니면 안 된다는 비장함도 없었다.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고서도 서럽게 울던 선수들의 모습은 서서히 사라졌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탁구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유승민(28·삼성생명)은 베이징 올림픽 당시 동메달을 딴 후 “동메달이 이렇게 값진 줄 몰랐다. 4년 전보다 더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같은 대회에서 남현희(29·성남시청) 역시 결승에서 아깝게 1점차로 패했으면서도 “아깝지만 후회 없는 게임이었기에 은메달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모습은 지난달 치러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엉뚱소녀’ 정다래(19)는 금메달을 따내고 통곡하긴 했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남자친구 이름까지 공개했고, 남녀 축구 대표팀은 동반 금메달 목표가 좌절된 후에도 끝가지 최선을 다해 강호 중국과 이란을 꺾은 후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스스로 좋아서 운동을 시작했고, 경기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이런 모습을 통해 국민들이 스포츠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고 있다. 과거 오로지 성적에 집착하며 숨죽이며 결과를 지켜보던 모습에서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성숙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잘 하던 스포츠에서 보다 다양한 스포츠로 관심이 옮겨가고, 보는 스포츠에서 하는 스포츠로 스포츠를 대하는 자세도 그 사이에 달라지고 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