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가르기 정치 지양-특별 기고] “不通의 문제 풀려면 정치가 먼저 변해야”

입력 2010-12-09 17:18


그 시절에는 전화가 오면 동네 이장이 확성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일일이 알려야 했고 TV 연속극을 보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들이 한 집에 모여야 했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기를 통해 전화뿐만 아니라 문자 메시지도 주고받고 인터넷까지 자유롭게 하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같다.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제 사람들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손쉽고 편안하게 생각과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의사전달 수단이 편리해졌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과거보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소통이 더 안 된다고 느끼면서 갑갑해한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자신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여기고, 여당은 야당과 대화가 안 된다고 갑갑해한다. 또한 보수는 진보를, 진보는 보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적으로는 어디서나 소통이 가능한 유비쿼터스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쉽게 넘을 수 없는 높고 견고한 벽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벽으로 구획된 집단 내부에서라면 물론 그런 갑갑함은 없다. 천안함이든 4대강이든 한·미FTA든 어떤 이슈를 바라보는 시선이 동일한 사람들끼리는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집단 내의 이와 같은 의견의 공유는 내부적인 동질감을 강화시켜 주지만 그런 만큼 ‘내 편’ 밖에 존재하는 ‘네 편’과의 차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이런 갈등이 정치권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정치의 중요한 기능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정치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시 정치가 변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온 것이 소통의 부재였다. 어쩌면 이 대통령은 이런 지적에 대해 오히려 답답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소통을 위해 애쓰고 있는지 아느냐라는 항변을 할 법도 하다. 그러나 소통과 관련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하려고 노력하는데 남들이 내 생각을 몰라준다거나 혹은 나는 옳은 말을 하는데 상대방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설득함으로써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소통의 본질은 아니다. 진정한 소통은 남의 말, 반대자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소통이 잘 안 된다는 불만은 약한 쪽, 배제된 쪽, 소외된 쪽에서 제기하게 되는 문제이다. 스스로 힘을 지니고 있고 권력의 배려를 받는 이들이 소통의 부재를 거론할 까닭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명박 정부 들어 소통의 문제가 많이 거론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동안의 공직 인사나 정책 추진 방향이 어느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갈등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건강한 정치 발전의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상이한 정치적 가치, 이념 간의 경쟁은 서로에게 긴장감을 주고 보다 발전적인 형태로 변화해 가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경쟁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태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름’이 단순한 편 가르기와 대립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소통의 중개자의 역할은 역시 정치가 담당해야 할 몫이다. 민주화 이후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 걸음 진전된 사회 발전을 위해 보다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리더십과 정치문화의 확립이 절실해지고 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국정당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