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갈등 넘어 통합의 길로] 한반도 이념 대립史… 분단이 원죄 충돌 가능성 상존

입력 2010-12-09 17:21

한국은 이념 대립의 씨앗을 태생적으로 배태했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분단됐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전 신탁통치 찬반 논란이 한반도 전역을 달궜다. 1945년 해방 후 냉전의 양대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협정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자 미·소 양국은 각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지지 세력을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 등이 암살되고 박헌영 등은 테러의 표적이 됐다.

제주 4·3 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도 남로당 지도부가 경찰서와 관청을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희생자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탁통치에 끝까지 반대해 통일의 상징처럼 남았던 김구는 49년 피살됐다. 그는 당시 유력한 다음 대선 주자였다. 친미 우파 중심의 이승만 정권이 체제 유지를 위해 공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정부 수립 후에는 정권이 체제 유지를 위해 이념 대립을 악용한 측면이 크다. 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선전포고 없이 남침했다. 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100만명 이상이 숨졌다. 분단은 고착화되고 이념 대립은 더욱 격화됐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정권반대 세력과 공산주의자를 등치시켰다.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진보당 조봉암 창당위원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명목으로 민주주의를 희생하는 일명 ‘개발독재’ 체제를 가동했다. 민주화 세력은 쿠데타 세력 반대 차원에서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80년 군부가 또 쿠데타로 집권하려하자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의 방조로 반미 정서가 강해졌다.

민주화 진전 후 이념 대립은 구체적 사안을 둘러싸고 사회 전반에서 일어났다. 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은 좌파, 우파 내에서 평가가 엇갈렸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통일운동의 한 축이었던 한국대학생총연합회(한총련)에 대한 이적 규정과 연세대 사태가 있었다.

재독 철학자 송두율씨와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이념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한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싸고 좌우, 보혁 간 갈등이 빚어졌다.

한반도에서는 최근 북한의 연평도 도발과 같은 물리적 충돌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이 같은 사건은 여전히 우리 사회 이념 대립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