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생들의 희망과 도전] 오늘은 남들보다 한 걸음 더딘 것 같아도…

입력 2010-12-09 17:33


취업 전선 뛰어든 대학생 김세권씨… 정체는 NO! 앞으로 쭉∼ 나가야죠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토익 945점. 이만하면 ‘엄친아 스펙’이다. 엄친아는 ‘엄마 친구의 아들’의 준말이다. 열등감을 느낄 만한 비교대상을 뜻한다. 스펙은 기기, 설비의 성능을 뜻하는 영어단어 Specification의 준말이다. 구직자 사이에서 학력, 학점, 토익점수, 각종 자격증을 총칭한다.

고교 시절 축구하다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돼 군면제 판정을 받았다. 생일도 빨라 재수를 했지만 또래보다 2년을 벌었다. 친구들은 막 제대해 복학을 준비할 시점이지만 취업 전선에 나섰다.

김세권씨. 새벽까지 과제를 준비하다 겨우 2시간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먹고 오전 9시에 등교했다. 오후 3시까지는 강의가 없어 취업용 자기소개서를 썼다. 오후 수업을 듣고 저녁을 먹은 뒤 오후 7시로 예정된 다른 수업의 조모임에 참석했다. 주말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후 8시쯤 귀가한다.

세권씨는 겨울방학을 앞두고 동계 인턴 자리를 알아보느라 바쁘다. 그는 “학교 다닐 때는 몰랐는데 막상 취직을 앞두고 보니 청년실업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100명도 뽑지 않는 인턴 자리에 1000명 넘게 지망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회사 7곳에 지원서를 내고 통보를 기다리고 있다. 기술력을 갖추고 장래성 있는 튼튼한 회사에 들어가고 싶단다.

취업 경쟁도 어렵지만 학교생활도 만만치 않다. “학점을 챙기기 위해 낭만을 누릴 시간이 없다. 상대평가 시스템이라 내가 놀면 다들 나보다 앞서니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말에선 비장한 느낌마저 묻어난다.

애초 그는 법조인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보수적인 성격인데 법조계로 나가면 고지식한 사람이 될까 염려해 방향을 틀었다. 재수 끝에 학교를 먼저 선택했고 뚜렷하게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영학과를 골랐다.

신입생 시절 학교 앞 유흥가는 매일 북적거렸는데 지금은 좀 한산한 편이란다. 세권씨는 “학생들이 공부를 더 많이 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10년 뒤엔 어떤 모습일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취업한다면 10년 만에 대단한 위치에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통찰력을 갖고 세상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직장을 다니면서 이론과 실무를 갖추도록 준비하고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시기를 보내는 그는 스스로에게 “정체되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오기까지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노력했는데 입학 후 정체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뛰어난 학생에게 밀린다는 생각과 ‘일류 대학’ 다닌다는 것 말고는 이뤄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정체되지 않고 계속 나갔으면 좋겠다.” 세권씨의 새해 소망은 취업 잘되고 좋은 사람 만나 사랑하는 것이란다.

한시적 실업상태서 재도약 노리는 양형우씨… 톱니바퀴 인생보다 ‘행복찾기’ 목표

대학은 쳐다보지 않았다. 목돈을 버는 것은 중요치 않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계약이 만료돼 실업급여를 받고 있지만 오히려 감사하다.

양형우씨는 지난달까지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전산보조기사로 일했다. 제대 직후 운 좋게 일자리를 잡아 어엿한 직장인이 됐다. 교실 등에 설치된 컴퓨터, 영상·음향 기기를 고치는 일을 했다. 전임자가 육아휴직으로 자리를 비운 8개월의 한시 근무였다. 한달에 90만원 박봉이지만 초등학교 일과에 맞춰 퇴근시간이 빨랐기 때문에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 시원치 않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 더욱 성실히 일하려 노력했다. 남자 교사 부족은 형우씨가 일하던 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힘쓰는 일’은 도맡아 했지만 싫지 않았다.

수입과 시간이 생기자 형우씨는 꿈을 향해 눈을 돌렸다. 가스펠을 좋아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던 그는 헤리티지 메스콰이어라는 가스펠 동호회 문을 두드렸다. 가창력이 좋은 개그우먼 신보라씨도 이 동호회 출신이다. 화려한 솔로는 아니지만 화음을 이뤄내는 것이 무척이나 즐겁다.

형우씨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던 길이기에 선택하지 않았다고 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 등록금 내기가 버거운 이유도 있지만 간절히 바라지 않은 길에 투자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 술에 의존하면서 형우씨네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머니가 설문지 조사원으로 일하며 형우씨 형제를 키웠다.

어린 나이에 굴곡을 겪어 어두울 법도 하지만 형우씨는 여느 청년보다 더 밝았다. 얼마나 욕심을 내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세상은 누구에게나 살기 좋은 곳이라는 신념으로 산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게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느긋한 대답이 돌아왔다. “남들이 모두 간다고 따라가는 것보다 제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톱니바퀴로 살기보단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배움에 대한 욕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퇴근 후 야간대학에 다니고 싶고 내년부터는 진지하게 준비할 생각이라고 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공부를 해보고 싶단다. 어쩌면 신학이 될 수도, 아니면 역사 공부가 될 수도 있다.

형우씨는 취직 준비를 하는 또래 학생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앞으로 나간다는 게 부러워요. 꾸준히 공부하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할 수 있으니까요. 저에게는 그게 쉽지 않아요.”

제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인생 설계라도 해보게 됐다.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지만 가급적 일찍 결혼을 해 살가운 가정을 꾸릴 생각이다. 풍랑이 심했던 가정에서 자라난 탓이라고 했다.

선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