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영신 (2) 신행합일 아버지 삶, 7형제가 이어받아

입력 2010-12-09 14:03


아버지 박명수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70회 총회장을 역임하셨다. 아버지는 일제 강탈기에 경성신학교를 다니셨다. 하지만 그 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가 생겨 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낙향을 하셨다. 이 같은 신분 때문에 아버지는 작은 시골동네에서 언제나 일본 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순사들이 찾아와 아버지를 데려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아버지는 늘 감시의 대상이었고,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혐의를 씌울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떻게 순사들은 아버지를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불러가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일제 강점기의 부도덕함은 나에게 아픔, 분노 같은 것을 갖게 했다.

광복 이후에 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서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오셨다. 학교를 다니실 때는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 학우회(총학생회) 회장도 하고, 당시 감신대, 조선신학교, 연희대 등 6개 기독교학교 학생회연합회 회장도 하셨다. 졸업 후인 1946년, 아버지는 인천의 송현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셨다. 그때 나는 송현초등학교 2학에 다니고 있었다. 교회에는 풍금도 있고, 서울의 음대생, 의대생들이 주일마다 열심히 가르치셨다. 하지만 고향 교회에서 아버지를 간절하게 부르시는 바람에 송현교회에서는 몇 년밖에 목회를 하지 못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교와 교회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문경에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다. 내가 문경초등학교 5학년 때다. 아버지가 아시는 분들이 서울에도 계시고 북쪽에도 많이 계셨다. 이분들이 우리 집에 많이 피난 오셨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피난처를 구하기도 했다. 일제 강탈기,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그 어린 나이에 난 ‘우리가 참 힘없는 나라구나’ ‘거대한 세계체제 속에서 한 부분으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당시 문경이라는 공동체와 유엔군 사이에 자그마한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하셨다. 전혀 영어를 잘하시는 분은 아닌데 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중공군이 내려오고 있다든지, 아군은 지금 어떤 상태라든지 등 최소한의 필요한 정보를 얻어서 문경 공동체 분들에게 알리는 일들을 하셨다. 군대의 중요 부서 책임자들이 자주 교회를 방문해 의논하고 자문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교회 목사가 지역 공동체의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준 롤 모델이었다.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은 나로 하여금 세계를 더 넓게 볼 수 있도록 자극을 주었다.

아버지는 1960년대에 서울의 청량교회에 부임하셔서 1989년에 원로목사가 되셨다. 아버지는 지나치리만치 아주 검소하신 분이었다. 2008년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모든 게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한번도 ‘당신의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몸을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하시겠다고 밝히셨다. 실제 그대로 실천하셨다. 난 아버지의 그런 정신을 우리 7형제가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생각한다. 나와 형제들도 아버지의 삶을 실천하겠다고 이미 다짐했다. 난 지금도 가진 게 많든 적든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삶의 자세를 갖는 게 세상의 어떤 명예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