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상온] 위키리크스와 미디어의 역할

입력 2010-12-08 17:44


“정부의 투명성은 높여야 한다. 그러나 정부에는 때로 은밀한 활동도 필요하다”

‘아!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 명색이 기자랍시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 귀 열어놓는 게 밥벌이 밑천인 내가 이렇게 무지한데 오로지 자기 일에만 매달린 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모르고 넘어가는 것들은 도대체 그 얼마나 많은 것일까!’

‘폭로 전문(專門)’ 인터넷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 전문(電文)을 보면서 든 첫 생각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두 번째 생각은 그동안 전통적인 언론, 곧 신문 방송 같은 이른바 올드 미디어는 뭘 했는가 하는 일종의 자괴감이었다.

위키리크스는 정보와 함께 논평 등을 보도하는 전통적 의미의 언론이 아니다. 뉴미디어인 것은 틀림없지만 폭로를 원하는 ‘내부고발자’들이 자료를 띄우는 ‘창(窓)’ 혹은 ‘장(場)’이다. 그래서 위키리크스는 웹사이트에 전문의 원문을 공개하는 한편 영국의 가디언, 미국의 뉴욕타임스, 독일의 슈피겔 같은 올드 미디어에 전문을 넘겨줌으로써 또 다른 폭로 수단으로 병용했다.

상념은 두 번째 생각에서 그치지 않았다. 설령 언론이, 구체적으로 올드 미디어가 폭로된 내용을 알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보도하는 게 옳은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뒤따랐다. 시민의 알 권리와 국익, 또는 공공의 이익 간 대립이라는 고전적인 명제.

한 예로 위키리크스가 6일 인터넷에 공개한 세계 전역의 ‘주요 기반시설과 핵심 자원’ 목록을 보자. 이는 미국이 자국의 안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것들로서 해외 주재 미국 외교관들이 작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저 통신케이블을 포함해 세계 각국의 일부 방위 시설을 비롯한 송유관, 핵발전소, 희귀광물 등 주요 시설과 자원이 망라돼 있다.

이를 두고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차관보는 “어샌지(위키리크스 창업자)가 미국을 노리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많은 나라와 지역의 이익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 한마디로 ‘테러조직에 주는 선물’(영국 더 타임스)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위키리크스 측은 이 문건이 미국 외교관들의 해외 스파이활동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등) 정부의 투명성을 확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바야흐로 세계는 위키리크스 옹호파와 반대파로 갈려 한판 대결에 돌입할 판이다.

사정은 좀 다르지만 언론의 비밀 공개 논란은 우리나라 내부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둘러싼 군사기밀 노출 얘기다. 천안함 피격 침몰 때도 그랬지만 연평도 포격사태에서도 온갖 군사기밀이 언론을 통해 드러났다. 앞으로의 계획을 포함한 서해5도 주둔 국군의 무장 대비태세는 물론 작전 세부 상황, 국군의 정보 및 첩보 수집·판단 능력 등. 심지어 공영방송이라는 KBS는 포격 직후 ‘독점 취재’라는 타이틀을 붙여 연평도에 다연장로켓이 전개되는 장면까지 공개했다.

이에 따라 군 기밀 공개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시급히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윤영철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장의 지적처럼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알 권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좀 더 구체적인 선을 시대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알 권리와 국가 안보를 비롯한 국익, 또는 공공의 이익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는 지난할 게 뻔하다.

왜 그런가. 양자의 한계를 가르는 기준을 설정하기가 지극히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언론현상을 연구하는 언론학이 아직도 이 문제의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고전적인 숙제로 놔두었을 리 없다. 양자간의 충돌을 풀 수 있는 해법은 어쩌면 ‘페르마의 정리’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위키리크스든 우리 언론이든 미디어의 역할과 관련해 참고해야 할 발언은 있다. 엊그제 국내 신문에 실린 노벨 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말이다. “정부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지지한다. 그러나 위키리크스식 (정보) 유출은 때로 국가에 요구되는 은밀한 활동과 사생활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접근이 될 수 있다.”

김상온 카피리더 s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