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바람 지휘봉에 춤추는 은빛 억새… 어머니 치맛자락 같은 포근함이 있다

입력 2010-12-08 18:18


제주 오름으로 떠나는 초겨울 억새여행

“억새풀은 언제고 죽은 모습이다/무덤이 없어 죽음을 밭에 세워 두고 있다/너는 억새풀을 닮지 마라/죽을 때까지 버티는 쑥부쟁이/절벽이 밀어 내도 그대로 서 있거라/구부러진 생명이라고/하늘이 뽑아 내지는 않을 거다”(이생진의 ‘죽은 상태로 살아 있는 억새’)

‘그리운 바다 성산포’가 인연이 되어 명예제주도민증을 받았다는 이생진 시인. 제주도의 바람을 필름에 담다 한줌 흙이 되어 중산간에 묻힌 고 김영갑 사진작가. ‘섬의 시인’과 ‘바람의 작가’가 30년 가까운 나이를 초월해 우정을 나누고 자연과 교감한 무대는 제주도의 오름이었다.

제주도의 오름 368개 중 모양과 느낌이 같은 오름은 하나도 없다. 오름은 계절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또 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그래서 오름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나 다름없다. 변화무쌍한 그 풍경화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하얀 억새가 바람의 지휘봉을 따라 격렬하게 춤추는 초겨울의 문턱이 아닐까.

‘오름의 왕국’으로 불리는 한라산 동쪽 중산간에서 오름과 억새가 만나 정겨운 풍경화를 그리는 곳은 용눈이오름. 세 개의 봉우리와 세 개의 분화구, 그리고 두 개의 알오름으로 이루어진 용눈이오름은 이생진 시인과 김영갑 작가의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곳이다.

이생진 시인은 ‘김영갑 생각’이라는 시에서 “그대는 가고 ‘숲 속의 사랑’은 다시 세상에 나와/바람과 햇살 사이로 그대가 걸어오는 듯 나뭇잎이 흔들리네.//물안개가 시야를 가리던 어느 날,/날더러는 감자 밭에서 시를 쓰라 하고/그대는 무거운 사진기를 짊어지고 사라졌지”라고 추억했다.

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초겨울의 용눈이오름은 능선을 수놓은 하얀 억새꽃이 인상적이다. 돌담에 둘러싸인 산담을 지나 능선에 서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거센 바람이 한라산과 바다에서 불어온다. 능선에 납작 엎드린 하얀 억새가 연신 비명을 지른다.

정상에서 보면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누워있는 형상의 용눈이오름은 이웃의 다랑쉬오름을 비롯해 한라산, 우도, 성산일출봉 등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지는 포인트. 능선과 분화구의 선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지만 태양이 기울면 선을 경계로 강렬한 빛과 그림자가 ‘삽시간의 황홀’을 연출한다.

다랑쉬오름으로 가는 길에 한 무더기씩 피어있는 억새꽃의 몸짓은 진혼무(鎭魂舞)를 닮았다. 1948년의 4·3사건으로 전소된 ‘잃어버린 마을’에 뿌리를 내린 때문일까. 인근의 다랑쉬굴에서 4·3 희생자 유골 11구가 발견되었다는 검은 표석이 아니더라도 묵은 집터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억새꽃이 그날의 아픔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월랑봉으로도 불리는 다랑쉬오름은 높이 277m로 남서쪽의 높은오름(405.3m)에 이어 이 일대에서 가장 높다. 깔때기 모양의 원형 분화구는 백록담 깊이와 비슷한 115m. 정상에 서면 아끈다랑쉬오름과 용눈이오름, 따라비오름 등 인근의 오름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랑쉬오름 동남쪽에 이웃한 아끈다랑쉬오름의 자태는 시골처녀처럼 수수하다. ‘아끈’은 제주 방언으로 ‘작은’ ‘버금’의 뜻. 이생진 시인이 매년 4월 4·3사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시낭송회를 개최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아끈다랑쉬오름은 능선을 수놓은 억새꽃의 실루엣이 멋스럽다.

여섯 개의 봉우리와 세 개의 원형분화구, 그리고 아름다운 능선으로 이루어진 따라비오름은 ‘오름의 여왕’으로 불린다. ‘따라비’라는 이름은 모지오름에 이웃해 있어 마치 지아비와 지어미가 서로 따르는 모양이라 그렇게 지어졌다. 따라비오름은 생김새도 색다르다. 크고 작은 봉우리가 오밀조밀 어우러진 데다 부드러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비오름에선 억새의 키와 바람의 세기가 반비례한다. 바람이 약한 오름 하단은 억새가 어른 키보다 크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져 정상에는 아예 잡초들만 무성하다. 발아래 원형분화구를 가득 채운 억새만이 일엽편주처럼 거센 바람에 몸을 맡긴다.

따라비오름과 억새가 어우러진 모습은 주차장 옆 들판에서 볼 때 가장 감동적이다. ‘송이’로 불리는 붉은색의 퍼석퍼석한 화산재 알갱이가 깔린 산책로를 중심으로, 이생진 시인의 시처럼 ‘죽은 상태로 살아 있는 억새’가 들판을 이루고 있다. 붉은 흙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 억새는 육지와 달리 붉은 기운이 감돈다. 억새밭에서 보는 따라비오름은 한 폭의 그림. 고개를 돌리면 광활한 억새밭 너머로 한라산과 오름군이 걸개그림처럼 걸려있다.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은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산굼부리 분화구의 동쪽 기슭. 천연기념물 제263호인 산굼부리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로마의 원형경기장처럼 둥글다. 제주도의 오름 중 유일하게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없이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수천평 넓이의 산굼부리 억새밭은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에 가장 아름답다. 금발의 여인이 머리카락 휘날리며 말을 달리듯 황금색으로 물든 억새꽃이 들판 가득 출렁인다. 그러나 태양이 한라산 봉우리와 입을 맞추는 순간 금발은 은발로 변한다. 이윽고 해가 한라산 뒤로 가라앉으면 산굼부리 억새는 마지막으로 실루엣의 장관을 연출하며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오름. 그곳은 ‘죽은 상태로 살아있는 억새’의 끈질긴 생명력을 조우하는 만남의 장소다.

제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