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경자] 헌책방에서 만나는 세월

입력 2010-12-06 17:40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독자의 마음을 느끼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다”

지하철을 두 번 탄다. 열일곱 군데쯤 되는 역을 지난다. 그리고 낙성대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간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앞을 바라보면 여러 개의 간판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 하나가 있다. 흙 서점. 책방 이름이 좀 남다르긴 하다. 하기야 그곳에 물건을 맡긴 후배도 농부다. 농부 시인 후배가 내게 줄 물건을 그곳에 맡겨놓고 찾아가라고 했다.

서점 앞엔 낡은 책과 음반과 비디오 같은 것들이 쌓여 있다. 방금 들어온 책들, 아직 정리하지 못한 더미들 사이로 서점의 문이 숨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드문드문 책을 들고 읽거나 살피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물건 찾는 건 뒷전으로 미루고 책 구경을 시작한다. 오래전에 꼭 읽고 싶었는데 그만 구입하는 걸 놓친 책도 있고, 한껏 젊은 날 분기탱천해서 읽었으나 그 의미조차 잊은 책도 보인다. 이젠 사라진 출판사의 책들, 이 세상을 떠난 저자들의 책도 있다.

세월을 달리하는 낡은 책들 사이에서 내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아주 멀리 밀려나 있던 내 인생의 갈피들이 주르륵 한바탕 물결을 일으키는 기분이다. 책은 단지 내 인생의 갈피를 이리저리 젖히게 하는 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책이 마구 읽히던 시절, 어떤 책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들이 모두 그 작은 헌책방에 모여 내 인생과 겹쳐진다.

지금은 중견을 넘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언론인. 그가 아주 팔팔해서 우리 사회와 역사에 묻히거나 숨겨놓은 거짓을 참지 못하던 정의감이 고스란히 드러난 책도 있다. 너무 날카로운 정의감, 아직 여물지 않은 풋정의감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본다. 나도 그렇게 쓰던 때가 있었지, 속으로 웃는다. 하기야 좋은 약에도 독은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좋은 보약도 누구에게나 듣는 건 아니니까. 이 나이 되도록 겨우 이거 하나 깨달았다.

검은 흙 같은 인상의 서점 주인은 내가 소설가인 걸 알고는 내 책도 가끔 나오긴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니 참 다행이다 싶다.

어쨌든 책 여러 권을 한 권 값에 사서 들고 돌아왔다. 그중 어떤 사회과학 책을 펼치니 주인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다. 그리고 첫 장에 구입 당시의 감회를 꾹꾹 눌러 쓴 글이 있다. 여기에 그것을 옮길 수는 없지만 글에는 젊은 기운이 훅훅 끼쳤다. 젊다는 것은 갈등과 고뇌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러니 갈등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는다면 젊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할 책 주인의 고뇌를 통해 내 고통의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아득하리라 여겼던 그 시절, 이제 늙은 나와는 상관도 없을 그 시절이 이리 금방 되살아나리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다.

젊은 날, 괴테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사서 그 책 첫 장에 왜 그리 무어라고 선언문 같은 걸 적기 좋아했던지! 지금 그런 책들은 모두 어느 고서점이나 혹은 휴지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누군가 내 책을 사서, 서툰 사인과 그런 글귀나 문장 아래에 그은 표시를 본다면 그도 나와 같은 감회에 젖을지 모른다.

헌책을 쌓아놓고 있으면 마치 먹고 싶다가 먹지 못한 음식을, 마침내 푸짐하게 차려놓고 혼자 맛보는 기분이다. 어떤 철학 서적엔 페이지마다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다. 더러는 그 밑줄이 내 생각과 맞아떨어지고 어떤 부분은 왜 여기에 밑줄을 그었지? 그런 의문을 품게 된다. 잠깐 타인의 마음을 더듬는 것도 즐겁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마음이나 생각을 가늠하는 것 말고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독자의 마음을 느끼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다. 다른 인생과 교감하는 즐거움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즐기는 채팅이라는 게 이런 것과 흡사한 걸까?

또다시 그곳에 간다. 책을 구경하고 고른다. 아주 낡아서 잘못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귀중한 책도 있다. 소설가에게 필요한 책이다. 귀중한 자료, 상상력을 넓히게 하는 책, 교양도서도 골라서, 메고 간 배낭이 묵직하게 담는다. 그게 모두 책 한두 권 값이 채 안 된다.

다시 한 번, 나는 모르되 취향이 같은 독자 한 사람의 인생을 느끼며 독서를 시작하려니 갑자기 내 인생에 빛이 반짝 돋는 기분이다. 사소하고도 깊은 맛이다.

이경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