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전 대법관 학술대회 참석 “법원, 사회 변화 읽는 데 서툴다”
입력 2010-12-05 19:38
“사시 합격생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있지만 착시현상에 불과해요. 우수한 여성들이 사회의 다른 분야로 진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고시로 몰리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그 분야에 꿈을 갖고 있는 남성들에게도 불리합니다.”
김영란(54) 전 대법관이 지난 4일 서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젠더법학회 학술대회에 참석해 ‘법정과 젠더’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이 자리에서 성범죄 사건에서의 법리 해석 문제 등에 대해 설명했다.
“성범죄 사건에서는 정황증거를 가지고 강간이 아니라는 판결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텔에 순순히 따라왔으면 강간이 아니라는 식이지요. 프랑스 등 서구에는 누드비치가 있는데, 여자가 거기 갔으면 성폭행을 당해도 된다는 건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편견을 극복할 방안을 찾아야 되겠지요.”
성범죄를 친고죄로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서는 “성범죄에서의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법관 재직 당시 일화도 소개했다. 2005년 대법원은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벌어진 소송 사건을 심리했는데, 대법관들끼리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렸다고 한다. ‘사회가 이미 변했다’ ‘사회 통념이 여성 종중원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변하지는 않았다’며 맞선 것.
급기야 대법원은 일반인·법학 전문가 등을 상대로 여론조사까지 벌였다고 한다. 이때 대다수의 여론이 ‘여성 종중원 찬성’에 답한 것으로 나와 대법관들이 크게 놀랐다고. 결국 대법원은 여성도 종중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7년에는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 여교사에게 술 따르기를 강요한 사건이 심리됐다. 당시 대법원은 이 행위가 성희롱인지 여부를 두고 심리한 끝에 ‘성희롱이 아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저는 그 사건 재판 전 여성부에 있으면서 ‘성적 남용’이라는 결정을 내린 당사자였기 때문에 심리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지요. 제가 개입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어떻게든 전원합의체(대법관 전원이 소속된 재판부)로 끌고 와서 판결문에 반대의견이라도 썼을 거예요.”
현직 판사와 법대생 등 그의 강연을 들은 청중들은 “대법원이 판결을 위해 여론조사까지 하다니 놀랍다”, “법원 구성원들이 사회 변화를 읽어내는 데 서툴다는 지적에 공감한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김 전 대법관은 2003년 여성 최초로 대법관에 임용된 뒤 여성과 사회적 약자 편에 선 법리해석과 소수 의견 제시로 주목받아 왔다. 그는 지난 8월 퇴임 뒤 변호사 개업을 마다하고 10월부터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