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애옥] 시장에는 삶이 있다
입력 2010-12-05 19:11
재래시장을 다녀왔다. 20년 넘게 다니고 있는 교회의 길 건너편에 위치한 광장시장이다. 옷을 팔고, 원단이나 제수 용품을 판다는 정도만 알았지 시장 안을 제대로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식구가 많지 않다보니 생필품은 동네 슈퍼에서 그때그때 주문해서 먹고 생활하고 있는 나로서는 마음먹고 하루를 투자한 관광코스였다. 틈날 때마다 같이 한강변을 걷고 수다도 떠는 동네 친구와의 동행이었다. 그녀는 시장예찬론자이다. 부부싸움을 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인 날은 무조건 10만원을 들고 남대문시장이나 광장시장을 향한다고 한다. 그런 날은 우리 집 식구들이 왕만두를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마음에 드는 그릇 하나, 옷가지 하나, 그리고 줄서서 왕만두 몇 개 사오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친구이다.
물론 재래시장의 물건들이 단순히 가격과 품질만을 비교해 봤을 때 대형마트나 할인점에 비해 결코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안다. 그러나 재래시장의 묘미는 주인과의 흥정이 가능하고, 단골로 인정받았을 때 덤이라는 인정을 끼워 받을 수가 있다는 것 외에도 옛것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빠진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새 푸짐한 먹거리와 사람들 구경으로 시장 한복판에서 삶의 현장을 즐기고 있었다.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 주시던 시루떡만큼 두툼하고 큰 녹두 빈대떡 한 장을 나눠먹고 단무지와 홍당무만 들어있을 뿐인데 묘하게 계속 먹게 되는 마약 김밥을 몇 줄 해치우고 나니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게 되고 뭔가 따스한 기운이 올라왔다. 디저트로 수수부꾸미까지 하나 먹고는 오늘도 다이어트 실패라 하면서 깔깔대는 아줌마가 되니 그 순간만큼은 아무 걱정 근심이 없고 행복하였다. 열심히 먹음직하게 만들어 건네시는 시장 아줌마들은 진정한 전문가들이셨다.
고향을 떠나오기 전까지 가끔 아버지 손을 잡고 5일장에 갔었다. 아버지는 장터국밥 뚝배기 한가운데에 수저를 꼽아 보아서 수저가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건더기가 푸짐하면 흐뭇해하시면서 국밥 한 그릇을 뚝딱 드셨다. 예닐곱 살 때로 기억된다. 각설이 타령에 맞춰 신나게 가위질을 해대시던 엿장수 아저씨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눈이 참 예쁘게 생겼다며 엿 한 토막을 떼어 주셨다. 얼마나 자존감을 높여준 에피소드였던가.
누군가 순댓국에 소주 한 잔을 들이키며 세상 시름을 읊조린다면 옆자리에 앉아 하소연을 들어주어야만 할 것 같은 곳이 바로 재래시장이다. 재래시장을 살리자는 거창한 구호 이전에 삶이 시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 가까운 장터를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 냄새가 나고 동네 어귀에 있던 느티나무 같은 곳. 그냥 그곳에 가서 푸근함과 삶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재래시장의 가치는 충분하고 재건 또한 어렵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광장시장을 나와 지하철을 타려고보니 어느 사이 양손 가득 비닐봉투가 들려있어 승차카드를 댈 손이 없었다. 서양 영화에 나오는 종이봉투를 한 아름 안은 모습과는 대조적이지만 검정 비닐봉투마저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그런 날이었다. 재래시장 포에버!
김애옥 동아방송예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