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로 간 사진찍는 목사, 홍진선 목사
입력 2010-12-03 17:55
[미션라이프] 지난달 29일 서울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남 완도행 버스에 몸을 실은 지 6시간. 완도에 다다르자 콧속으로 짠 냄새가 스며들었다. 출항을 앞둔 배들의 고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에 몸을 실었다. 섬들 사이를 가로질러 배는 물살을 갈랐다. 선착장엔 청산도(靑山島)라고 쓰인 돌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있을 때 선글라스를 쓴 중년 남성이 다가왔다. 홍진선(46) 목사였다. 명함에는 ‘사진작가 홍진선’이라 쓰여 있었다. ‘사진 찍는 목사’와의 청산도 여행이 시작됐다.
청산중 사진반
그의 낡은 봉고차에 올라탔다. 창문이 닫히지 않았다. 찬 바다 바람을 온 얼굴로 받아야 했다. 봉고차는 ‘탈탈’ 소리를 내며 힘겹게 언덕 꼭대기 지점에 도달했다.
‘청산중학교’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 섬에 하나 뿐인 중학교다. 쉬는 시간.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 놀고 있었다. 함께 간 사진기자는 “애들 저렇게 커야지”라고 중얼거렸다.
언덕 아래를 굽어보니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물살을 가르는 배 한 척, 흰색 등대,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섬들. 이런 곳에서 공부하는 서른일곱 명 아이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홍 목사가 한 학생에게 “애들 불러와”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모였다. 하나같이 홍 목사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8명의 아이들. 홍 목사가 가르치는 사진반 학생들이었다.
“오늘은 어디 가서 찍을 거예요?” 눈이 반짝였다. 홍 목사가 입을 열었다. “범바위로 가자!” 아이들은 “와”하고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은 봉고차에 뛰어 올랐다. 조심스레 사진기를 다루는 모습은 흡사 사진작가와 같았다.
봉고차는 굉음을 뿜어내며 범바위로 향했다. 옛날 호랑이나 날짐승이 살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범바위. 그곳에 오르니 청산도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옹기종기 붙어 있는 지붕들, 해변에 있는 소나무. 모든 게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양서진(15)양은 “오! 조금만 늦었으면 해 지는 것 못 볼 뻔했어”라며 기뻐했다. 오후 4시45분. 구름 사이로 태양이 하루의 마지막 빛을 내뿜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아이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홍 목사의 지도 아래 4월부터 계속 사진을 찍어서일까. 능숙했다. 1학년 고병준(13)군이 오른손 검지로 셔터를 살포시 눌렀다. 여기저기서 ‘찰칵’ ‘찰칵’ 필름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이어졌다. 한 쪽 다리를 길게 뺀 수영이, 양쪽 무릎을 굽힌 은영이, 삼각대에서 카메라를 떼 한 쪽 무릎을 꿇은 영준이. 모두 개성이 넘쳤다.
“이런데 와서 사진 찍는 우리 아이들은 복 받은 거죠.” 학생들을 따라온 이 학교 정연국 교장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한 마디 했다.
사진 찍는 목사
홍 목사는 원래 서울 목동 제자교회에서 사역했다. 도시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적어도 지난해까지 말이다. 촉망받는 젊은 목사는 2008년 안식년을 얻었다. 가족과 함께 터키를 방문했을 때 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새로운 일을 하라.” 이탈리아에서도 같은 음성을 들었다. 그는 기도했다. “제게 맡겨주실 일이 무엇인지 몰라 답답합니다. 하지만 순종하며 나아가겠습니다.”
그는 교회에 사표를 냈다. 처음엔 다문화가정 자녀를 위한 대안학교를 구상했다. 전북 정읍 출신인 그는 그 지역에 다문화가정 자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을 위한 시설을 지어 도움을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7월 청산도에서 사진 찍을 기회를 가졌다. 그 먼 곳에 다시 오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열흘 동안 밥 먹는 시간만 빼고는 사진을 찍었다. “오전 4시에 숙소에서 나가 밤 12시까지 사진 찍었죠.”
그런데 희한했다. 사진을 찍고 섬을 나온 이후 이상하리만큼 청산도와 그 곳의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심지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많아졌다. 하루는 잠이 오지 않아 청산도에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펼쳐 들었다. 당시 의미 없이 찍었던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힘겹게 땅을 일구고 있는 노인의 얼굴에 눈길이 멈춰 섰다. 왠지 모르게 슬픈 눈, 깊게 패인 주름. 마음이 아팠다.
청산도의 인구는 서서히 줄어 지금은 1800여명에 불과하다. 평균 연령은 70세가 넘는다. 노인의 슬픈 눈에서 미래가 없는 청산도의 내일이 그려졌다. ‘이 땅을 살리고, 사람들이 계속 그 땅에 살 수 있도록 목사인 내가 할 일이 없을까.’ 고민을 거듭했다.
아이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그는 올해 1월 청산도에 다시 들어가 눌러 앉았다. 청산중 아이들에게 사진 찍는법을 가르쳤다.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처음엔 시큰둥했던 아이들은 사진을 통해 자신이 사는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기 시작했다.
“외부인인 제가 사진을 가르치게 된 데 교장선생님의 역할이 컸죠. 학교를 살리고 섬을 살리겠다는 마음이 맞았습니다.” 정연국 교장 역시 학교를 살리기 위해 전남 장흥에서 2007년 자원해 이 섬으로 들어왔다.
홍 목사는 이전에 자신이 했던 제자훈련을 청산도에서 사진을 가르치며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선한 성품, 비전과 가치관을 사진에서 찾았으면 했다. “지금의 세상은 많이 오염돼 있어요. 세상을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찾아내고 사진으로 남겨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면 조금이나마 세상이 좋게 보이지 않을까요?”
그는 신기했다. 사진만 가르쳤을 뿐인데 아이들의 말투와 행동이 달라졌다. 처음에 아이들은 욕과 비속어를 즐겨 썼다. 질문을 해도 답하지 않기 일쑤였다. 하지만 홍 목사에게 사진을 배운 지 7개월. 아이들의 입에서 ‘나쁜 말’이 사라졌다. 웃음과 자신감도 되찾았다.
“저희 집에서 밥을 먹는데 다 차려졌는데도 애들이 밥을 안 먹더라고요. ‘목사님이 기도해주셔야 숟가락 들죠’라고 말하더군요.” 홍 목사는 이 곳 아이들의 변화하는 모습이 너무 기특하다며 기뻐했다.
이날 밤 인천에 살고 있는 초등학생 딸이 전화를 했다. “아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사랑해.” 수화기 너머로 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빠 좋은 일해서 너무 멋있어요. 파이팅.”
청산도=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조국현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