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첫 소설집 ‘영이’… 상처입은 아이들 유일한 해방구는 ‘폭력’

입력 2010-12-03 17:29


날 것의 언어로 반항하는 무서운 아이의 출현. 소설가 김사과(26)의 첫 소설집 ‘영이’(창비)는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그가 5년 전 단편 ‘영이’를 발표하고 등단했을 때 받았던 충격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영이’에서 개 같은 아빠를 정말로 개로 만들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빠를 통해 표출되는 가족에 대한 냉혹한 경멸과 선혈 낭자한 폭력 묘사는 새로운 유형의 잔혹극을 연상시켰다. “또다시 내리치려는 찰나 그곳에 있는 것은 아빠가 아니라 커다란 개 한 마리였다. 피로 범벅이 된 개는 혀를 쭉 빼고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반쯤 뜨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중략) 엄마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32쪽)

영이의 집에는 늘 술 취한 아빠가 있다. 영이는 가능한 늦게 귀가하고 싶다. 문턱을 넘어가는 것은 지옥의 늪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오싹한 일이다. 폭력 아빠는 보란 듯이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고 엄마는 타이레놀을 삼키고 자고 있다. 집은, 그리고 아빠는 영이에게 넘지 못할 장애물이다. 아빠와 엄마가 벌이는 초긴장의 대립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영이는 생각한다. 십정초등학교 5학년3반 18번 김영이. 영이가 길고 길게 죽고 싶다고 느낀다. 마침내 아빠가 뜰 안 감나무 아래에서 술병을 빨고 있을 때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해 삽으로 아빠를 내리친다. 그리고 외친다.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이 말은 영이에게 ‘기쁘다 구주 오셨네’와도 같은 말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김사과는 자신의 식물성 필명과는 정반대로 육식성 언어로 더 단단히 무장한 채 온갖 분노와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후속작들을 발표한다. 단편 ‘과학자’에서 고추장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힌 채 고추장을 탐식하던 ‘나’는 거식증인 여자친구가 고추장 먹기를 거부하자 그녀의 몸에 고추장을 마구 발라 ‘붉은 찰흙으로 빚은 인형’을 만들어버린다. “난 한나의 몸을 반듯하게 펴고 허벅지 위에 앉아 통에 든 고추장을 한나의 몸에 펴바르기 시작했다. 때맞춰 양들이 무우- 하고 울었다. 당신의 기분이 불길할 때에는 집에서 고추장이라도 퍼먹어보시죠. 하지만 그래봤자 기분은 역시 그대로일 겁니다.”(63쪽)

단편 ‘준희’의 ‘나’는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훈계를 늘어놓는 선생을 살해하는 상상을 하고, 나중에는 선생이 정말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뛸 듯 기뻐한다. “위암 말기였대요. 그래서 학교를 잠시 쉬고 있었대요. 그는 내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하였을까요? 그는 내가 보낸 이메일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죽은 것은 아닐까요? 거짓말같이 말입니다. 영화같이 말입니다.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때요, 아아 나는 기뻤습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114쪽)

소설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가정과 학교라는 폐쇄적인 강제와 폭력 안에서 상처 입고 자란 탓에 미래를 박탈당한 아이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발작적인 분노와 폭력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법밖에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분노는 방향 없이 종국에는 스스로를 악몽의 한 가운데로 몰아간다. 하지만 그 분노의 근원에는 ‘정상성의 외관에 감추어진 한국사회 시스템의 억압성과 폭력성’(문학평론가 김영찬)이 깃들어 있으며 김사과의 소설은 그 결과이자 원인을 들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분열증세와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파괴의 반영. 그게 김사과가 들고 나온 문제의식인 것이다. 만약 김사과 소설이 불편하다면 그건 그의 소설이 고발하고 있는 문제를 바로 보기 두려워하는 독자들의 문제인 것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