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 밑에 토치카, 왕릉에는 비상방송 벙커… 서울은 군사요새였다

입력 2010-12-02 18:07


“1971년 6월쯤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외곽 경계지역에 그린벨트를 지정하라고 지시했어요. 제가 건설부 국토이용관리관이었는데, 은평구 불광동 북쪽 기자촌을 그린벨트에서 제외한 안을 들고 갔어요.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이 사람아 여길 왜 그린벨트에서 뺐어?’ 이래요. 그래서 ‘각하, 기자들 시끄럽잖아요. 골치 아파서 뺐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니야, 집어넣어’ 하더라고요. 북한과 다시 전쟁을 한다면 기자촌 인근 계곡에 인민군 2개 사단을 몰아넣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 계곡에 집결시켜 놓고 우리는 북한산에서 총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거야’ 이러시는 거예요. 그러니 시가지로 개발하지 말라는 겁니다. 박 대통령은 서울을 설계하며 그런 것까지 생각했어요.”(김의원 경원대 명예교수)

서울의 도시계획을 세울 때 첫 번째로 고려한 것은 효율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끄는 수도지만 북한 미사일 사거리 안에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군사도시 서울’의 설계는 60년대 말부터 본격화됐다.

68년 1월 21일,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다. 이들은 휴전선을 넘어 서울 부암동 세검정 삼거리에 이를 때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서울의 북문인 자하문 밖 부암동 평창동 일대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이곳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이었다.

1·21사태 이후 서울 북부 개발 정책은 ‘억제’에서 ‘촉진’으로 바뀌었다. 68년 2월 김현옥 서울시장은 ‘북악스카이웨이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자하문∼북악산∼정릉∼미아리를 잇는, 길이 6.7㎞, 너비 16m의 산간도로를 개설해 군용 도로와 시민 드라이브 코스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김 시장은 홍은네거리에서 정릉과 미아리로 이어지는 제2순환도로 건설계획도 내놨다. 이 도로를 완성하기 위해 북악터널이 뚫렸다.

68년 10월엔 동해안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00여명이 침투했다. 산악전을 벌이다 70년 3월이 돼서야 완전 소탕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 측 군인과 민간인 70명이 사망했다.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한창이던 69년을 맞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를 선포했다. 이에 발 맞춰 김 시장은 69년 1월 ‘서울시 요새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 중 대표적인 게 남산 1·2호 터널(사진 ①, ②)이다.

70년대 서울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지냈고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서울시 시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한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남산 1·2호 터널은 각각 중구와 용산 구민 15만명씩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자체 발전설비도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1호는 70년 8월, 2호는 이보다 한 달 앞서 개통됐다.

시청역에서 을지로6가까지 이어지는 지하상가(사진 ③)도 대표적인 방공시설이다. 그 무렵 정부는 전쟁 시 ‘서울 포기’에서 ‘수도 사수’로 전략을 바꾸고 있었다. 서울을 지키려면 전쟁이 나도 사람들이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대규모 대피시설이 필요했다. 도심에 집중 건설된 지하상가는 수도 사수를 위한 조치였다.

손 교수는 “겉으로는 도심 보행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 비상 시 서울시청을 이곳(을지로 지하상가)으로 옮겨 한두 달은 버틸 생각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신축건물에는 지하실이 의무적으로 설치됐다. 수도공급이 끊겼을 때를 대비해 지하저수조 설치도 강제됐다. 김의원 교수는 “지하 대피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땐 반드시 지하실을 만들게 했다. 지금은 가게들이 입점해서 장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사용 비행장, 여의도

서울 시내 주요 교차로에는 ‘토치카(참호)’를 파놓은 곳이 많았다. 전투가 벌어지면 군사용 포대를 쌓고 사격진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강 둔치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손 교수는 “시내 구석구석 놓인 우체통 중엔 가짜가 많았다. 토치카 파놓은 걸 위장하기 위해 우체통을 세워놓은 것이다. 도심 여기저기 숨겨둔 토치카에 대해선 함구령이 내려졌고, 그러다보니 인수인계가 잘 안돼 자연스레 사라졌다”고 말했다.

여의도광장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박 대통령은 70년 10월 “여의도에 대광장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용 비행장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71년 2월 20일 시작해 공사비 7억6000만원, 연인원 6만7300명, 장비 1만1000대를 들여 그해 9월 29일 완공됐다. 광장은 길이 1350m, 넓이 40만㎡에 달했다. 완공 이틀 뒤인 10월 1일 학생과 군인 30만명을 모아 이곳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열었다. 여의도광장의 원래 이름은 ‘5·16 광장’이었다. 손 교수는 “나중에 국방부가 필요 없다고 해서 공원으로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각종 문화재에도 군사시설이 설치됐다. 북한이 같은 민족이니 문화재는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2004년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은 “서울 창덕궁 내 방공진지 등 전국 문화재 구역 안에 설치된 군사시설이 8곳, 41만㎡에 달한다”고 밝혔다.

KBS는 76년 당시 문화공보부의 충무계획에 따라 창덕궁, 선릉(조선 성종과 정현왕후의 묘), 서오릉(숙종과 장희빈의 묘), 영휘원(고종의 계비 엄씨의 묘) 등에 170㎡ 안팎의 방송용 벙커 4개를 만들기도 했다.

가장 취약한 곳은 한강다리였다. 다리 양 끝엔 방공포 부대가 상주하곤 했다. 다리 폭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잠수교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 지어진 대표적인 다리다. 반포대교 아래 건설돼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다. 교각이 짧아 폭격 시 상판을 빨리 다시 깔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손 교수는 “한강다리는 폭격 당하면 어느 건설회사에서 책임지고 복구한다는 것까지 다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정부과천청사엔 미사일이 닿지 않는다

하지만 도심 요새화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서울의 주요 행정기능을 남쪽으로 옮기는 방안이 등장했다. 정부과천청사가 그 답이었다.

“미사일 사거리를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높은 산 뒤에 붙어서 북쪽에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막을 수 있었다. 박 대통령에게 군사 전문가가 정식으로 얘기해서 만든 것이다. 전시에도 경제부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경제부처만 옮겼다. 지금도 과천청사엔 미사일이 떨어질 수 없다.”(손 교수)

수도 서울은 식민지 시절에도 군사도시였다. 서울에는 아직도 일제가 만든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신문로 경희궁 터엔 일제가 만든 지하벙커가 있다. 위치는 경희궁 동편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인근의 둔덕 아래다. 철제 울타리에 막혀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다. 일제 말기 일본군이 미군 폭격에 대비해 군 사령부로 쓰려고 만든 곳이다. 이 벙커는 80년대 중반 경희궁 복원 때 발견됐다. 넓이 930㎡, 평균 폭 7m, 길이 105m에 콘크리트 외벽은 두께가 3m나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시설들은 추억이 됐다. 지금 군사적 역할을 하는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 서울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남산 1·2호 터널을 대피시설로 쓴다는 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죠.”(서울시 관계자)

추억을 되살려야 하는 시절이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