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황귀비까지 오른 못생긴 궁녀

입력 2010-12-02 17:21


‘못생긴 엄상궁의 천하’/송우혜/푸른역사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나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몰락하는 왕조의 마지막 후예들은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일 수밖에 없다. 마치 시대의 필연을 그 자신의 몸으로 체현하기라도 하듯. 고종,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순종,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우리 황실의 마지막 주인들 역시, 그 하나하나의 일생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기구했던가. 아귀와도 같은 불행의 손을 벗어난 자 없고, 망국의 굴레를 피해간 자 없었다. 그리고 여기 엄귀비(순헌황귀비·1854∼1911)가 있다.

‘못생긴 엄상궁의 천하’는 고종의 막내아들 영친왕의 일대기를 다룬 ‘마지막 황태자’(푸른 역사) 시리즈의 1권이다.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가 주인공이다. 중궁전의 지밀상궁이었던 엄씨가 명성황후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고종의 승은을 입은 뒤 궁궐에서 쫓겨나고, 을미사변 후 닷새 만에 다시 입궐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저자는 소설가이자 사학자이지만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학술서는 더더욱 아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매천야록, 당대의 신문 기사 등 다각적인 기록을 섭렵해 하나의 실에 꿰맨 저자의 유연한 솜씨가 놀랍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스스로 정치가가 되었던 한 여자의 일생이 때로는 문학적 감수성을 통해, 때로는 치밀한 고증을 통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엄귀비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여걸, 명성황후 민씨의 생애 역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이야기는 엄씨가 아닌 명성황후로부터 시작된다. 열다섯 살의 중전 책봉과 시아버지와의 반목. 거기까지였다면 조선 왕조 500년 내내 흔하디흔했던 왕실 야사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과 일본,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혼탁한 정국과 왕비의 생애가 오버랩되면서, 모든 음모에서 살아남은 뒤에도 왕비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아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역사를 상기하는 모든 이들처럼 저자도 을미사변을 서술하면서는 다소 냉정을 잃은 흠이 있다. 엄씨는 상전이었던 황후에게 대담함과 권모술수를 배웠다.

왕비 참살은 쫓겨났던 엄씨에겐 행운이 되었다. 재입궐 후 황자를 낳고 귀인과 순빈(純嬪)을 거쳐 황귀비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 황후 자리가 비어 있던 대한제국의, 사실상 국모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엄씨는 이른바 ‘아관파천’(1896) 정국에서 맹활약하고, 자기 아들을 황위 계승자로 만든다.

황태자 영친왕이 허울 좋은 유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지만 않았더라도 엄씨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개 궁녀에서 황귀비가 되었다가 급작스레 생을 마감한 엄씨의 일대기는 명성황후의 생애보다 더 극적인 데가 있다.

엄귀비의 사진은 이 책에도 실려 있고 현재까지 여러 장 남아 있다. 지금은 물론 옛날의 미적 기준으로 보아도 미인이라 불릴 만한 외모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이사벨라 비숍으로부터 ‘투명한 피부에 훤칠한 외모’라는 평을 들은 명성황후는 그렇다치고, 왜 고종은 엄귀비를 총애한 걸까. 저자는 꽤나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한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던 고종이 가장 믿을 만한 보좌역으로 엄씨를 택했다는 것. 수라간에서 만드는 음식조차 의심스러웠던 당시 상황에서 능력과 충성심을 겸비한 측근은 부인밖에 있을 수 없었단 얘기다. 명성황후 시해 후 불과 닷새 만에 엄씨를 불러들여 세간의 구설을 자초했던, 고종의 유약한 이미지는 상당 부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2권 ‘황태자의 동경 인질살이’는 1907년 고종이 퇴위하면서 정식으로 황태자에 책봉된 영친왕의 일본 생활을, 3권 ‘왕세자 혼혈 결혼의 비밀’은 일본 황족 이방자 여사와의 결혼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비 시해와 을사조약이라는 전대미문의 참사를 겪고도 국권 유지에 대한 의지를 끝내 지켰던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라는 냉혹한 정치인의 이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자는 영친왕 이은의 인질생활을 그의 삶을 그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다각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접근, 입체적인 영친왕 상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역사읽기에 서툰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서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