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힘이 없을 때 희생된 이들 끝까지 책임”

입력 2010-12-01 21:26


사할린 강제 징용자 유골 조사 의미·일정

정부가 러시아 사할린 땅 전역에 흩어져 있는 일제 징용 사망자들의 묘지를 조사하고 유골을 봉환키로 한 것은 현재진행형인 역사와 민족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정부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식민지 시기 이역만리로 끌려 가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쓸쓸히 죽어간 고인들의 한을 풀고, 아울러 그 유족들의 오랜 고통을 달래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의미와 배경=이번 결정에는 국가가 힘이 없어 형극의 길을 가야했던 희생자들에 대해, 비록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라도 국가가 잊지 않고 일정한 책임을 감당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어쩌면 주권 국가가 당연히 수행해야 할 부분이지만 역대 정권에서는 일본 및 옛 소련과의 외교 문제 등을 이유로 외면해 왔다. 고인의 묘지를 확인하고 유골을 찾고 싶어 하는 유족들은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애끓는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노무현 정권 때인 2007년 7월부터 정부가 사할린 공동묘지 5곳의 일부분에 대한 샘플조사를 벌여 총 580기의 한인 묘지를 확인했다(본보 2009년 11월 16일 1·4·5면 참고). 하지만 이후 작업은 더 진척되지 못했다. 국회에서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 달여 사이에 국회 행정안전위 소속 여당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예산 배정 필요성을 제기하고,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이 이를 흔쾌히 수용하면서 사할린 공동묘지에 대한 전수조사 방침이 전격적으로 결정됐다. 양측이 이 사안을 공식적으로 처음 논의한 지난 9일 행안위 전체회의 때 발언에는 그 취지와 의미가 잘 담겨 있다.

비공개 의사록에 따르면 한나라당 간사인 김정권 의원은 “계속 이렇게 외면하면 안 된다. 징용자들의 묘지 실태를 조사해서 송환하는 것이 기본적인 국가의 도리”라고 강조했다. 같은 당 유정현 의원도 “징용자들의 유해를 아직도 사할린에 놔둔다는 것은 국가로서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며 “예산 자체가 그렇게 큰 액수가 드는 게 아니다. 장관과 차관은 반드시 책임을 지고 확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맹 장관은 “일제 강점기 때 강제 징용돼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또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국가에서 끝까지 책임지고 돌봐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이후 행안위는 우선 내년도 예산으로 6억8000만원을 편성한 행안부 예산안을 지난 22일 전체회의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사할린 예산 배정에는 청와대의 의중도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4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사할린 유골 봉환이 착실히 진전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일제가 수탈한 문화재급 도서의 반환 합의에 가려져 잘 부각되지 않은 부분이지만, 사할린 문제에 대한 청와대의 의지는 이미 분명했던 셈이다.

◇현지 조사 어떻게 진행하나=남사할린 땅에는 브이코프, 유즈노사할린스크, 코르사코프 등 모두 21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이들 묘지에 순서를 정해 차례대로 조사를 진행하는데, 2011년 4월부터 8월까지 5개월 간 1차 현지조사가 실시된다. 사할린은 겨울 날씨가 혹독해 9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눈과 추위로 작업이 불가능하다.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실무를 총괄 지휘하지만 일선 조사 작업은 공신력 있는 단체에 용역을 주게 된다. 이미 샘플조사 경험이 있는 지구촌동포연대(KIN)에 주로 용역을 맡겨 조사팀을 구성할 예정이다. 여기에 사할린주 한인이산가족협회 등 현지 한인단체들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본보가 입수한 정부안에 따르면 조사팀은 4명을 한 팀으로 해 총 8개 팀으로 구성된다. 이들 팀은 공동묘지를 구역별로 나눠 맡아 한인들 묘지를 하나하나 찾은 뒤 잡초 제거와 좌표(GPS) 기록, 묘비 글자 판독, 사진 및 영상 촬영 등의 활동을 벌이게 된다. 한인 사망자에 대한 기본 자료가 없는 탓에 공동묘지 일대를 발로 뛰어다니며 무덤을 일일이 눈으로 찾고 이름과 생년월일, 본적 등을 기록할 수밖에 없다. 가이드 역할과 묘비의 러시아 글자(키릴문자) 판독을 위해 각 팀에는 필수적으로 사할린 한인을 1명씩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한 달에 공동묘지 한 곳씩, 평균 2000기의 묘비를 처리한다는 목표다. 연간으로는 해마다 1만기씩 조사해서 2014년까지 총 4만기에 대한 작업을 완료해 전체적인 유골 분포도를 작성키로 했다. 각 공동묘지는 보통 축구장 200개 면적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거대한 데다, 여름에는 온통 수풀로 뒤덮이고 모기떼까지 극성을 부리기 때문에 작업이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낫으로 잡초를 쳐내고 수시로 모기약을 뿌리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4년간 예산은 24억∼27억원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유골의 신원과 유족 확인 작업이 완료 되는 대로 순차적으로 유골 봉환을 추진하게 되는데, 봉환 비용에는 별도의 예산이 편성될 예정이다.

글·사진=특별기획팀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