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유골 조사’ 예산안 통과 주역 신윤순씨 “의원실 100번 넘게 찾아가”

입력 2010-12-01 18:16


사할린 징용자 유골을 전면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정부 예산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하기까지는 한 60대 할머니의 헌신과 집념이 큰 영향을 미쳤다. 징용자를 아버지로 둔 신윤순(66)씨가 그 주인공이다. 중국·소련이산가족회(1972년 설립된 사단법인) 수도권지역 회장을 맡고 있는 신씨는 유족들의 애타는 심정을 호소하기 위해 2009년 12월부터 여의도에서 살다시피 하며 국회의원 사무실을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도움 받을 수 있는 곳은 다 찾아갔습니다. 의원이나 보좌관이 바쁘다고 문전박대를 해도 만나줄 때까지 계속 갔어요. 1주일 연속 찾아가기도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요. 의원들이 워낙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으니까. 불쌍하고 소외된 유족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신씨가 찾아간 의원실은 주로 사할린 문제와 관련이 있는 행안위와 외교통상위 소속으로 모두 21곳이다. 방문 횟수가 총 100회를 훨씬 넘길 것이라고 했다. 행안위 한나라당 간사인 김정원 의원은 기자에게 “이번 사할린 예산 편성은 전적으로 신윤순 회장님의 열성으로 성사시킨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신씨의 아버지는 25세 때인 1943년 9월 30일, 고향인 전북 임실군 금정리에서 일본인 순사와 면서기 등에 붙잡혀 갔다. 당시 어머니는 결혼한 지 불과 10개월 된 16세 새색시였다. “그때 어머니는 저를 임신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상태였어요. 저는 이듬해 사실상 유복자로 태어났죠. 아버지는 징용을 피해 한 번 도망간 적이 있긴 한데, 그로 인해 할아버지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모진 매를 맞은 걸 알고는 할 수 없이 끌려갔다고 합니다.”

떠난 지 두어 달 뒤 아버지가 입고 갔던 흰색 무명 겹옷이 집에 배달됐다. 새까만 탄가루로 범벅이 돼 있었다. 그래서 탄광으로 끌려간 것으로 가족들은 짐작했다. 1950년 1월에 편지가 한 번 온 것을 마지막으로 소식은 영영 끊겼다. 신씨에게는 해야 할 사명이 있다.

“내년 5월에 유족 30∼50명 정도가 사할린 묘지 조사 현장에 동행하려고 해요. 다 늙은 유족들이 직접 아버지 묘지를 찾아다니면 일본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징용자 명부, 사망자 명부, 우편저금 명부 등을 일본이 반드시 내놓도록 해야지요. 그래야 강제 동원된 사람들 숫자가 얼마인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못 받은 임금 액수가 얼마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유족들을 모아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준비하고 있어요. 해마다 8·15 광복절이 되면 더 슬퍼지고 괴로워지는 유족들을 위해 정부도 좀 더 애써주길 바랍니다.”

글·사진=특별기획팀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