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식 기자, 태국 선교 현장을 가다] “육상선수 되면 엄마 만날 수 있겠죠? ”
입력 2010-12-01 18:54
② 우본 ‘다리 밑 동네’ 아이들
태국은 불교의 나라답게 어디를 가나 길모퉁이를 돌면 절이 나왔다. 사람들은 대부분 요람에서 무덤까지 절문화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생로병사, 빈부귀천 등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고 했다. 굳이 자신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다음 세상에서 잘 태어나면 된다는 것이다. 우본(라차타니) ‘다리 밑 동네’(땀본 샌쑥) 빈민가 사람들도 얼마 전까지 그랬다. 하지만 지난 9월에 발생한 대홍수 이후로 생각이 변하고 있었다.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의 ‘복덕방(떡과 복음)’이 들어가면서부터다.
불경 외우던 아이들 ‘딥 다운’송
우본을 끼고 있는 문강 일대를 위성사진으로 보면 ‘<’ 모양이다. 왼쪽이 강북이고 오른쪽이 강남이다. 한국과 달리 극빈층이 사는 지역이 강남이다. 위에서 아래로 직선을 그으면 ‘◁’ 꼴이다. 저지대상습 침수지역이다. 핫수완야, 푸양 등 6개 마을 700가구 2500여명이 빈곤의 늪에서 허덕인다. 5∼15세 아동은 549명이다. 이 중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106명이다.
“하나 둘, 하나 둘…태권 야” 방과후 수업 중인 핫수완야초등학교는 한국 시골의 작은 학교 같았다. 태권도 구령소리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반에선 낯익은 복음송을 번갈아 연주했다. 지난 17일 오후 방과후 교실이 끝나자 어린이들은 각자 사용한 물품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치웠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쓰레기 청소와 같은 변화는 상상도 못했다.
마을 사람은 물론, 아이들까지 홍성원 목사와 허기동 선교사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탕과 초콜릿으로 환심을 사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심을 쓰러 온 관광객이겠거니 하며 외면한 것이었다. 방과 후 교실에도 파리가 날렸다. 홍 목사와 허 선교사는 매일 6개 마을을 돌면서 부모에게 아이들을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먼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소녀시대’ ‘동방신기’ ‘비’ 등 한국의 인기 연예인 동영상을 보여줬다. 역시 대박이었다. 하나둘 모여든 아이들은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태권도와 한국말을 배우겠다는 아이들이 생겼다. 음악 시간엔 복음송도 자연스럽게 배웠다. 하교하기 전 불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불경을 외우던 아이들의 입에서 CCM곡 ‘딥 다운’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달려라 시라콧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따완 텅언(13)군은 지난 9월까지만 해도 ‘왕자님’으로 통했다. 어린이개발사업(CDP) 방과후 학교가 주최한 연극 ‘백설공주’에서 왕자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젠 왕자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두 달 전 토요일 불꽃놀이용 폭음탄에 불을 붙이다가 그만 제때 던지지 못해 오른 손가락을 거의 다 잃었다.
따완의 아빠는 알코올중독자다. 술을 먹지 않으면 일용직이라도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런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생계를 책임지는 이는 올해 37세 된 따완의 어머니다. 초등학교 옆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그녀는 하루 종일 땡볕에서 벽돌을 찍고, 뜨거운 가마 옆에서 일을 한다.
벽돌공장에서 만난 따완은 상처가 아직 덜 아물었는지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한 손을 다치고도 엄마를 돕겠다고 찾아온 효심이 기특해 보였다. 아들의 손을 감싸 쥔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따완은 “의사가 돼 자신은 물론 손과 발을 잃은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14세 수파펀 시라콧은 중학교 2학년이다. ‘말괄량이 삐삐’처럼 잘 달려 학교 대표선수로 뽑혔다. 아직 물이 덜 빠진 2층집에 사는 그는 수줍은 듯 말없이 웃기만 했다. 말이 2층집이지 조금만 센 바람이 불면 확 넘어질 것 같다. 각목을 이어서 올린 목조 건물이었다.
그의 엄마는 태어난 지 2개월 만에 집을 나가버렸다. 아빠는 노숙을 하다가 얼마 전 시신으로 발견됐지만 딸은 이 소식을 모른다. 몇 달 전 할머니마저 하늘나라로 떠나 작은 할머니가 그녀를 돌보고 있다.
“저는 달리는 것이 좋아요. 마구 달리면 구름들이 왠지 엄마와 아빠를 그려가는 것 같이 보이거든요. 유명한 달리기 선수가 되면 엄마를 만날 수 있겠지요.”
마약중독자들 “센터로 써주세요”
홍 목사의 예상은 적중했다. 아이들이 변하면서 어른들도 달라졌다. 40대 중반의 ‘떵’이라고 불리는 이장이 어느 날 홍 목사를 급하게 불렀다. 자신의 오토바이 뒤에 타라는 것이었다. 겁이 났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떵은 평소에 일반인들이 출입하지 않는 건물로 안내했다.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기거하는 건물이었다.
“홍 목사님, 이 건물을 당신들에게 줄게요. 무료로 쓰세요.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세요. 까막눈인 어른들에게도 글을 가르쳐주세요.”
홍 목사는 귀를 의심했다.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수십 년 동안 이 나라 정부나 수많은 민간단체들이 손을 내밀었지만 퇴짜를 맞은 터였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홍 목사는 “특별히 크게 손을 볼 곳이 없기 때문에 450만원 정도면 마을 주민들과 어린이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면서 “올해가 가기 전에 말끔히 정리해 센터를 개소하고 싶다”고 말했다.
18일 오후에는 침수된 마을에 긴급 구호품이 전달됐다. 420가구에 쌀 5㎏, 꽁치 통조림 10팩, 라면 1상자씩을 나눠줬다. 물에 잠겨 직접 물품을 가지러 나오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이장이 대신 받아갔다.
우본 아시아선교교회 쌍완싹(47) 목사는 “기아대책의 후원자들이 여러분을 돕기 위해 정성을 보낸 것”이라며 “은혜를 잊지 말고, 한국 사람들처럼 어려운 이웃들을 도울 수 있는 날이 하루 속이 오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다.
우본(태국)=글 ·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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