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이끌었던 역사의 길을 가다… 끊임없이 고뇌하던 루터의 삶 오롯이 묻어나

입력 2010-12-01 17:34


‘길’은 많은 소리를 품고 있다. 사람들처럼 듣고 싶은 소리만 가려서 듣지 않는다. 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속삭임도, 탄식도, 외침도 모두 담는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 저편으로 많은 것을 잊는 사람들과도 다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다가 예전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다시 들려준다.



길의 소리는 역사를 담고 있는 책 속의 소리와 다르다. 역사 속 그 현장을 찾아가면 길은 담고 있는 그 시대의 바로 그 소리를 증폭시켜 쏟아놓는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전환을 이끌어낸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 마르틴 루터가 걸었던 ‘길’도 많은 소리를 담고 있다. 어쩌면 평범한 법관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를 루터가 사제의 삶을 결심했던 독일 동북부 튀링겐 주의 주도(州都) 에르푸르트의 길도 루터의 삶과 고뇌를 들려준다.

에르푸르트는 루터에게 중요한 곳이다.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던 비텐베르크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의 사고와 삶의 기초를 놓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열여덟 살이 되던 1501년부터 10년 동안 에르푸르트에서 지냈다. 철학과 법을 공부하기 위해 1392년 독일에선 세 번째로 개교한 에르푸르트대학을 다녔고, 사제로의 헌신을 결심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도승 생활을 했다.

이번 여정은 ‘루터를 따라가는 길’이다. 루터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제나흐를 둘러본 다음 날 100㎞를 달려 에르푸르트에 도착했다. 곧바로 페터스베르크 요새에 올랐다. 1664∼1707년 축조된, 중부 유럽에선 유일한 바로크 양식의 성곽이다. 페터스베르크 요새에서 바라본 에르푸르트는 ‘탑의 도시’라는 별칭답게 아름다웠다. 중세와 현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1260년의 역사를 은근하게 풍긴다.

루터 당시엔 이 요새는 없었지만 루터도 이 언덕을 넘어 에르푸르트에 들어섰다. 페터스베르크 요새 앞에는 에르푸르트의 자랑인 성 마리아 주교좌성당과 성 세베린 성당이 있다. 성 마리아 주교좌성당은 후기 고딕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탑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중앙 탑에 ‘그로리오사’라는 스스로 움직이는 종이 있다. 독일 최대의 종이다. 바로 옆의 성 세베린 성당은 초기 고딕 양식의 본당 다섯 개를 갖고 있다.

구교도였던 루터는 아름다운 두 성당을 바라보며 공부하려는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수도승이 된 후에도 화려하게 치장된 성당을 보며 사제의 꿈을 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 먹을 양식을 구해야 하는 수도승으로선 곤궁한 백성들의 삶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교회에서 나와 70개의 ‘교회 계단’을 내려가면 광장이 나온다. 매년 여름 이 계단에서 ‘교회 계단 축제’가 열린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4월에는 튀링겐 바흐 축제와 에르푸르트 바흐 축제가, 10월 11일에는 마르틴 루터를 기념하는 ‘마르틴 축제’도 이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성탄절 전에는 튀링겐 주에서 가장 화려한 ‘성탄절 시장’이 열린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끌벅적한 광장을 지나 옛 도심으로 들어서면 그 시절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독일에서 가장 큰 기념물로 보호를 받는 곳이다. 유럽 전역이 거의 파괴됐던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5% 정도만 파괴돼 옛 모습을 많이 갖고 있다. 옛 도심에는 긴급 차량을 제외한 어떤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옛 에르푸르트대학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중·상류층의 생활을 하며 법관이 되려고 했던 루터는 열심히 공부했다. 에르푸르트대학은 명문이었다. 문과와 법과, 신학과는 독일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시 이 대학은 ‘유명론’ 철학으로 유명했다. 유명론은 중세 스콜라 학파의 계파로, 보편이 우선해서 존재한다는 실념론에 대해 개체가 우선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루터와 멜란히톤이 최후의 스콜라 학자 가브리엘 빌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이 대학에서 1502년 학사 학위를, 1505년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이상을 추구하는 사제의 삶과 공부한 유명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자기 옆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경험을 하곤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눈을 돌렸다. 아버지의 반대와 친구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짧은 견습의 과정을 마치고 1506년 수도(修道)의 맹세를 했고, 그 이듬해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루터가 사용했던 수도원의 방은 아직도 루터를 찾는 이에게 열려 있다. 르네상스식으로 꾸며진 수도원의 정원에는 숙소도 마련돼 있어 일반인들도 머물 수 있다. 물론 예약이 밀려 1년쯤 기다려야 한다.

작고 빈궁함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방은 끊임없이 번뇌하는 루터의 생각을 담고 있다. 수도 생활을 하고 고해성사를 해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지성과 성품을 높게 평가한 수도원장이자 비텐베르크대학 교수였던 스타우피츠는 번민하는 루터를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추천했다. 루터의 사제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1508년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부임 이후에는 간간이 에르푸르트를 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 아우구스수도원을 나와 광장 쪽으로 다시 걸으면 크뢰머 다리를 건널 수 있다. 120m로 유럽에서 가장 긴 생활 다리다. 다리 양쪽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 나무다리는 1325년 석조로 재건축했다. 크뢰머 다리에는 각종 잡화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거는 동그란 공을 처음 만든 곳도 이곳에 있다. 루터는 이 다리를 건너 성 마리아 성당을 오가며 백성들의 삶을 목도했을 것이다. 1275년 건립된 에르푸르트 시청사에는 루터의 생애를 담은 벽화가 있어 간략하게나마 그의 생을 되돌아볼 수 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라’(시 118:17)는 글을 담은 루터의 동상은 바흐가 결혼한 카우스만교회 앞에서 에르푸르트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에르푸르트(독일)=글·사진 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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