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주리] 신문지는 따뜻하다
입력 2010-11-30 17:55
신문 보는 사람들이 줄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신문 대신 인터넷을 이용하는 게 대세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신문은 사라질까? 책 읽는 사람이 줄어도 책이 사라지지 않듯이, 텔레비전에 밀린 지 오랜 라디오가 사라지지 않듯이, 신문도 어쩌면 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신문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그날 하루의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전령사가 아니었던가? 요즘도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열심히 신문을 읽는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전하는 소식보다는 신문의 활자를 더욱 믿는 듯하다. 손으로 쓴 편지를 구경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활자란 얼마나 다정한 메시지일까?
신문지 냄새 또한 참 그리운 냄새다. 신문지로 둘둘 말아 군고구마를 싸주던 어릴 적 동네 어귀에서 군고구마를 팔던 아저씨가 생각난다. 그 아저씨는 군고구마를 팔아 넷이나 되는 자식들을 다 대학에 보낸 입지전적 인물로 유명했다. 추운 겨울 지하철에서 노숙인이 신문지를 덮고 자고 있다. 신문은 아직도 포장지 역할뿐 아니라 이불 역할도 계속하고 있다. 신문지는 덮고 자면 따뜻할까? 인터넷에서 읽은 인상적인 내용이 떠오른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노숙인들을 보면 신문지 많이 덮잖아요? 신문지가 그렇게 따뜻하다던데 실제로 어느 정도 보온 효과가 있을까요?” 누군가 이렇게 답했다. “저는 노숙을 전문적으로 여행을 해봐서 잘 압니다. 신문은 일단 찬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5도 정도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잘 때 밑에 깔아도 보온효과가 있습니다. 지금 제 사무실에서 난방을 하지 않은 채 밑에 신문을 몇 겹 깐 후 잠을 자고 있습니다. 훨씬 따뜻합니다.”
신문을 깔고 덮고 자는 노숙인이란 누구인가? 예전에는 노숙인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릴 적 거리의 거지들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불쌍한 존재처럼 느껴졌다면, 요즘의 노숙인들은 모두 가까운 친지 친척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노숙인이 될 수 있다.
거지와 노숙인은 사실 같은 말이다. 원래 돈이 없어 노숙인이 된 사람도 있지만, 멀쩡하게 살던 사람이 사업에 망하거나 친한 사람의 보증을 섰거나 빚에 시달리거나 직장을 잃어 살길이 막연해져서 거리로 숙소를 옮긴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뉴욕에 살았던 화가 김환기는 말년에 신문지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 신문이 우리나라 신문이 아니라 ‘뉴욕 타임스’라 해도 김환기의 신문지 그림은 영원히 남았다. 그 신문이 삭아 없어지고 이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읽는 용도가 아니라 깔거나 덮고 자는 용도로 쓰이거나, 분식집에서 배달 오는 된장찌개나 제육볶음을 덮는 덮개의 용도로 쓰이더라도, 나는 전쟁 없는 세상에서 신문을 읽으며 살고 싶다.
신문이 배달되어 내 손안에 쥐어지는 신문지의 촉감, 신문지의 냄새는 우리가 언젠가 안고 갈 아름다운 기억 중의 하나가 아닐까?
황주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