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임항] 욕망의 전환Ⅱ

입력 2010-11-29 17:56


가정에서 전등을 끄고, 멀티탭을 사용해서 아낄 수 있는 전기의 양은 많지 않다. 교육 차원에서는 이런 에너지 절약운동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한계는 뻔하다. 5∼10%를 줄이고 나면 더 줄일 게 없다. 승용차 부제도 마찬가지다. 주중에 하루 운행을 안 한다는 핑계로 주말에 더 많이 이용한다면 이산화탄소(CO₂) 배출감소 효과는 사라진다.

정부가 건축(상업) 부문의 CO₂배출량을 2020년까지 BAU(배출전망치) 대비 40%가량 줄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지만, 절대량으로는 거의 줄어들지 않는다. 건설 부문의 성장률 전망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도시개발이나 재개발 계획을 세울 때 아파트 평균 평수를 줄이고, 친환경 설계를 의무화하는 것이 CO₂를 줄이는 데 훨씬 더 효율적이다. 도시 편의시설을 교통 수요를 최대한 억제하는 방식으로 배치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파트 평균 평수를 줄이자는 말이 건설업 불경기가 닥쳤고, 단신 가구가 늘어나는 지금은 그렇게 큰 거부감 없이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반론이 더 거셀 것이다. 개인은 가치관과 결단에 따라서 경제적 능력이 있더라도 작은 집에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이 자발적으로 그럴 수 있을까.

주로 불매운동을 가리키는 보이콧은 특정 기업이나 단체에 대한 압력 행사의 수단으로 인식되지만, 더 넓게 특정 재화와 서비스 전체의 구매를 거부하는 것도 상정할 수 있다. 더 큰 집, 더 좋은 자동차, 더 나은 기능의 가전제품, 그것을 사기 위한 초과근로, 일류대 진학을 위한 학원 수업 등에 대한 집착을 많은 사람들이 끊을 수 있을까. 근로빈곤층과 비정규직에게는 소비를 더 줄일 여력이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휴대전화 바꾸지 않기 등은 이들에게도 가능한 선택이다.

만약 그런 집단적 보이콧을 조직할 수 있다면 내국인을 차별하는 자동차업계, 담합을 일삼는 건설업계, 과도한 기본요금을 부과하는 통신업계 등의 행태가 변할 수도 있다. 내수기업의 경우 수요가 10% 이상 감소하면 기업의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집단적 보이콧은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격월간지 ‘녹색평론’ 발행인인 김종철씨는 ‘포기를 통한 행복의 추구’라는 글을 통해 국가와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게임의 룰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역설한다. 김씨는 “자본주의 경제란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전제로 하고 그 욕망을 부추기는 게 소비문화”라면서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행복하면 물욕도, 권력욕도, (…)경쟁심도 약해지기 때문에 국가와 자본은 보통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폭력의 수단인 보이콧의 사례로 양심적 학교 거부, 양심적 부동산 투기 거부, 양심적 취직 거부 등을 들었다.

요컨대 집단적 욕망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량 소비의 욕망을 줄이는 대신 가족 및 공동체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정신적 만족을 높이려는 욕망을 키우자. 그런데 누가 앞장설 것인가. 노조와 종교 공동체가 적격이다. 시민운동과 환경운동 단체의 경우 회비를 내는 회원이 적은 반면 노조, 특히 한국노총, 민주노총과 같은 상급단체는 조합비를 내는 조직원이 60만∼7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당장의 노동 현안을 둘러싼 투쟁에 온 역량을 집중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더 많은 사회 분야에서 양심적 보이콧의 필요성에 대한 조합원 교육과 대국민 홍보가 필요하다.

욕망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삶의 여유와 정신적 만족을 누리고 기업의 행태를 친환경적, 소비자 친화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기후변화의 실질적 완화에 기여한다. 기후변화 대응책이 진정성을 가지고 효과를 거두려면 생산과 소비의 적정 규모화, 분권화, 지방화, 민주화 등 삶의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