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23) 18년 만에 찾은 조국… 민주화 시위 봇물
입력 2010-11-29 18:39
1970년 나는 다시 안식년을 받아 시카고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1년 반 만에 종교사회학으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아 루이빌로 돌아왔는데 평양 성화신학교 은사인 박대선 목사님께서 찾아오셨다. 연세대 총장이셨던 목사님은 “우리 학교 교목실에 와 달라”고 제안하셨다. 또 강원용 목사는 내 친구 한완상 박사를 통해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오셨다. 이번이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한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72년 가을, 한국을 떠난 지 꼭 18년 만에 처음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방송을 통해 ‘보리밭’ 노래가 흘러나왔다. 순간 타국 땅에서 살아오며 느꼈던 외로움과 향수가 봇물처럼 밀려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본 조국은 마음이 시리도록 반가웠다. 폐허였던 거리는 풍요로워졌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당시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높아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을 만나러 연세대에 가 보니 정문 앞에서 학생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었다.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학생들은 “군사독재 물러가라! 학원자유 보장하라!”고 외치며 돌을 던졌다. 미국에서 숱하게 겪은 시위였지만 고국에서 겪으니 착잡하기만 했다.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총장실에서 박 목사님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총장님, 저는 아무래도 여기서 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학교나 정부 쪽보다는 학생들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은사 되시는 총장님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괜찮아, 충분히 이해하네” 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또 불러주셨으면서도 내 처지를 먼저 생각해 주시는 은사님께 한없이 고마웠다.
이후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강 목사님을 뵙고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내가 미국에서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강하게 왔다.
그런 한편 ‘나에게는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오히려 미국에서 국제적 힘을 모으는 것이 한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포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곧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새롭게 깨달은 사명에 흥분되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나는 소수인종 교회들을 묶어내는 일에 착수했다. 72년 나는 우선 내가 속한 북장로교 안의 소수민족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해 ‘아시아인 교회협의회’를 만들었고 교단 총회로부터 정식 기구로 인정받았다. 또 총회 세계선교부 지역 총무직에 지원했다. 보다 세계적 사역에 뛰어들고 싶다는 의욕이 충만했다.
동양인에다, 미국에서 시골로 치는 켄터키의 목회자인 내가 총무에 선발된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73년 여름, 나는 10여년간 고향처럼 살았던 루이빌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총회 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이사를 갔다.
출근해 보니 뜻밖에도 내게 주어진 일은 아시아가 아닌 중동지역 총무였다. 그해 10월 처음 중동 선교지를 순회 방문하던 중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을 때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전쟁 중이었다. 하루는 공습 사이렌이 들리더니 호텔 전기가 모두 나갔다. 일제 때와 6·25때 듣던 사이렌이 떠올라 머리가 쭈뼛해졌다. 2주간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묶여 있었다. 이때 세계 곳곳이 언제든 전쟁이 날 위험 속에 있다는 것, 전쟁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