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44) 조선인 포로 400년 만의 귀환

입력 2010-11-28 17:45


임진왜란(1592∼1598) 중에 일본군에 붙잡혀간 조선인 포로는 최대 4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하면서 포로 귀환이 진행됐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조선인은 수천명에 불과했답니다. 일본에서 가정을 꾸리거나 그곳 생활에 적응해 조선으로 돌아오면 천대받을 것이 두려워 귀환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는군요.

조선인 포로 가운데 홍호연(1582∼1657)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1593년 진주성 근처 산음(지금의 산청)에서 일본군을 피해 바위틈에 붓을 들고 숨어있던 그는 진주성을 공격하던 일본군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붙잡혔지요. 어릴 적부터 한시와 서예에 능했던 홍호연은 나베시마의 눈에 들어 측근으로 지내면서 일본에 학문을 전파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답니다.

그의 글씨는 혹부리 모양의 독특한 서체로 교토시의 쵸호지(頂法寺)와 사가시의 요도히메 신사(神社) 현판 등에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했지요. 그는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76세에 ‘인(忍)’을 주제로 ‘참는 것은 마음의 보배요 참지 못하는 것은 몸의 재앙이다’라고 쓴 글씨에는 타국에서 지낸 인고의 세월이 느껴집니다.

홍호연의 후손인 요시로는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자료 88점을 2008년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 가운데 에도시대의 화가인 가키하라가 모사한 것을 1860년 홍가의 9대 당주인 홍안습이 개장(改裝)한 ‘홍호연초상’은 포로로 잡힌 어린 모습과 노년의 얼굴이 오버랩된 것으로 ‘인’ 글씨와 함께 사가현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답니다.

홍호연의 유품을 포함한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흔적이 담긴 유물들이 한국에 왔습니다. 일본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을 비롯해 유형문화재 소장 6개 기관의 73건 88점이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30일부터 내년 2월 6일까지 전시됩니다.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한 고국 땅을 죽어서 400년 만에 유품으로 밟게 된 감회가 어떠할까요.

이번 전시에는 임진왜란 때 납치된 후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된 조선인 도공 이삼평(?∼1656)의 가문문서(아리타 중요문화재), 일본군에 끌려가 억류된 상황에서도 주자학을 전수시킨 학자 강항(1567∼1618)의 목판본 시문집 수은집(睡隱集), 도덕규범을 성문화한 문서로 일본에 유교사상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 이매계의 부모장(父母狀) 등도 함께 선보입니다.

경남 하동 출신의 여대남(1581∼1659)은 시문이 출중하여 구마모토의 혼묘지(本妙寺) 3대 주지가 된 인물로 1620년 10월 3일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답니다. 이 편지의 추신에 홍요연이 산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글을 써 놓았지요. 그러나 이 편지는 결국 부치지 못한 채 혼묘지에 남아 전해졌고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됐으니 그 사연이 애틋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광형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