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22) 한국교회 놀라운 성장에 귀국 고민

입력 2010-11-28 17:23


1964년 가을 예일대학교에서 시작한 석사과정은 예정된 1년보다 짧은 9개월 만에 마칠 수 있었다. 하루빨리 루이빌로 돌아가기 위해 촌음을 다투며 공부한 덕택이었다.

65년 초여름, 아내와 아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졸업식이 열렸다. 그러자 대학 졸업식 때 사고무친한 나를 위해 달려와 줬던 프레스톤 부인이 생각났다. 신학교 3년간 장학금을 주며 어머니처럼 나를 지켜준 분이었다. 마침 며칠 전 축하 편지가 와 있었다. 편지에는 직접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혹시 잠깐 나를 보러 올 수 없겠습니까”라는 물음이 조심스레 달려 있었다. 읽을 때는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가봐야겠다 싶어졌다.

짐을 꾸려 뉴헤이븐을 출발해 밤새 차를 달려 찰스턴으로 갔다. 프레스톤 부인은 연로해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너무나 기뻐했다. 하룻밤을 그 댁에서 묵고 떠나면서 부인의 건강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 몇 개월 후, 부인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때 방문하지 않았다면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도 못할 뻔했던 것이다.

루이빌의 상황은 전보다 복잡해져 있었다. 3월 미국이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찬성과 반대 시위가 각각 확산 일로였고, 젊은이들의 징집거부 시위까지 벌어졌다.

가을학기가 시작한 얼마 후인 11월 13일 정오, 학생들이 모두 본관 앞에 모였다. 단상을 둘러싼 신문기자들의 취재 열기도 대단했다. 교목실에 있는 나에게 참전 반대 측 학생들이 찾아왔다. “오늘 저희 발언 때 참전지지 측의 공격이 예상됩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그 요청을 받아들여 교목실의 목사 네 명과 신부 한 명이 함께 단상에 올랐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학생 대표가 “오늘 모인 목적은…” 하고 말을 시작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계란과 토마토, 물 풍선이 날아들었다. 학생과 교목들 모두 범벅이 됐다. 곳곳에서 고성이 나고 다툼이 시작됐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적어도 대학 캠퍼스에서는 각자 다른 의견을 말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 없다면 이것이 무슨 대학이고 민주주의란 말인가?

나는 “뭣들 하는 건가!”라고 소리치며 시위대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 학생에게 말할 기회를 주라! 여기는 대학이란 말이다!” 내 고함에 놀랐는지 일시에 조용해졌다. 학생은 간단히 연설을 마쳤고 시위는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

다음날 일간신문 1면에는 토마토와 계란 범벅의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이 일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의식 있는 동양인 목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루이빌에서의 목회와 교목생활은 안정돼 갔다. 미국에 있는 몇몇 한인 교수들과 함께 ‘한인대학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런데 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괴한의 총에 살해됐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전국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얼마 후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 ‘말콤 엑스’와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도 차례로 암살됐다. 월남전은 장기화되고 대학가는 히피운동에 휩쓸렸다. 젊은이들의 마약 문제도 대두됐다. 일생 중 가장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시대였다.

이때 셋째 딸 미나가 태어났다. 서울에서는 영락교회가 주일예배를 네 번 드릴 정도로 부흥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한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제 돌아갈 때가 아닌가?” 싶어졌다. 한인대학인회에서 교류한 강원용 목사는 한국 교계와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목사, 공부 마치면 고국으로 오세요. 할 일이 많아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뜻하신 내 길은 달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