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0-11-28 19:15
(22) 예루살렘 가는 길
아내 몸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는데 별 일 없다는 게 우선 고맙다. 정신적인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가슴이 저리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라는 기도가 내게도 작동하는 듯하다. 아내처럼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아닌데도 마음 깊은 곳에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강한 의지와 주도적인 자세로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해 왔던 터다. 기회는 적극적인 사람이 잡는 것이며 자신을 스스로 신뢰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현실이 된다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아왔던 터다.
그러나 아내의 둘째 임신과 태중 아기에게 있을지 모르는 장애 가능성이 내게 한계상황을 느끼게 했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게 인생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사실 한 가지 행동만 취하면 벗어날 수도 있었다. 아내의 낙태(임신중절) 말이다. 그러나 아내와 장모님이 펄쩍 뛰었고, 그건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신앙적 규범과 그에 대한 순종이 우리 가정을 한계상황 속으로 몰고 갔다. 결국은 나도 동의했고 그래서 현재의 상황에 서 있게 된 것이지만 내 인생 철학과 행동 신조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내 삶인데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 스스로를 던져 넣다니!
묘하게, 아주 묘하게 예수의 길과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겹치고 있다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예수가 걸어가는 길은, 적어도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를 가까이서 따르는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2000년 전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과 달리 현재의 독자는 완결된 텍스트를 대하고 있다. 마가라는 사람은 예수의 길을 그렇게 그려나가고 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한 곳을 바라보고 계시다. 십자가다! 정확하게는 ‘십자가와 부활’이지만 방점은 십자가에 있다. 제자들 모두 이 십자가 때문에 당황하고 있다. 십자가 사건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면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었다.
마가복음 10장 32절은 이렇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의 마지막 길은 북에서 남으로, 갈릴리를 지나고 사마리아를 관통하여 지금 유대 지방에 이르렀다. 예수가 가려는 목적지 예루살렘이 저기 있다. 해발 800여m의 산성 도시를 오르셔야 한다. 예수는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가? 그 길은 자기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포기하고 삶의 한계상황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길인데!
마가복음을 처음 읽을 때는 모든 게 생소했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마음을 결정하지 않아서 그랬다. 그러나 일단 믿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마가복음이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예수란 분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전에 갖고 있던 기독교 지식이 꽤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길을 따라가면서, 따라갈수록 예수란 존재가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예수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의 정체를 정확하게 밝히면서부터 이 느낌이 심해졌다.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