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산업선교회, 한국기독교사적 되다
입력 2010-11-25 16:28
‘노동선교의 요람 민주화 운동 사적지’
서울 당산동 영등포산업선교회 앞엔 이렇게 쓰인 비석이 세워졌다. 건물 입구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가 수여한 ‘한국기독교사적 제8호-산업선교 발상지’ 동판이 붙었다. 25일 오후 민주화운동기념비 제막식과 총회 역사유적지 지정 감사예배가 진행됐다. 예장통합 김정서 총회장, 방지일 영등포교회 원로목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 등이 참석했고 인명진 이근복 진방주 전 총무를 비롯해 산업선교회 동문회원, 역대 실무자 등 70여명이 자리했다.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한 시대의 눈물과 절망과 감격과 보람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이 곳,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뒤쫓아 온 거룩한 추억의 공간인 이 곳에서 함께 예배드립시다!”라는 예배 인도자의 말에 참석자들의 표정에는 감회가 어렸다.
◇100년만큼 값진 52년=“이 건물이 역사 유적지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4층 높이 콘크리트 건물은 1979년에 지어져 30년이 채 안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총회 지정 한국기독교사적은 경북 자천교회 척곡교회, 전북 두동교회, 부산 일신여학교 교사 등 100년 안팎 역사에 문화재 수준의 역사적 가치를 가진 곳들이다.
이에 대해 총회는 “무형적 역사를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한다. 58년 처음으로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펼친 ‘산업선교의 발상지’이자 한국의 산업화 과정을 함께 겪어낸 ‘민주화 운동 유적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질서를 영등포에=선교회의 시작은 57년 예장 통합 총회가 선교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산업전도’를 결의하면서다. 당시 영등포가 한국 최대의 경공업단지였기 때문에 다음해 경기노회 영등포지구 산업전도회가 창립됐다. 전도회는 한동안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 예배모임을 만들고, 교회로 인도하는 본래 취지에 충실했다. 그러나 64년 총무에 취임한 조지송 목사는 주로 10대들, 심지어 12세 남짓한 여공들이 가혹한 업무량과 적은 임금, 쥐똥이 쌓여 있는 열악한 업무환경, 형편없는 식사 속에서 허덕이는 것을 보고 ‘이들에게 그저 성경 가르치고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이 복음인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 주자’는 생각으로 여공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모르는 것은 가르쳐 준 것이 산업선교 역사의 출발점이었고 한국 노동운동의 주춧돌이 됐다.
◇오래된 미래=선교회 손은정 총무는 “당시 기록을 보면 대단하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을 위한 강의는 한문 요리 꽃꽂이 등 교양 강좌부터 인문학 강의, 여가는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강사도 명문대 교수들을 비롯해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70년대 초 남영나일론 공장에서 일했다는 산업선교 동문회장 박점순씨는 “당시 선교회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줬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적은 월급을 어떻게든 잘 모으고, 잘 쓰게 도와주려는 노력도 있었다. 69년 시작된 신용조합은 73년 조합원 700명 수준으로 발전해 재무부가 인가한 1호 신용조합이 됐다. 78년 정부 탄압으로 해산된 뒤 만든 ‘다람쥐회’는 지금의 생활협동조합이고, 중고 옷 나누기 ‘한울안 운동’은 지금의 ‘아나바다운동’에 해당된다. 손 총무는 “어찌 보면 당시는 지금보다도 더 앞서간, ‘오래된 미래’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고난과 오해=선교회 사역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1970~1980년대 노동자의 편에 선다는 것은 ‘용공’ ‘좌파’ ‘빨갱이’를 뜻했기 때문이다. 72년 유신 정권이 들어선 직후부터 정부는 선교회를 각종 시국 사건과 연결시켜 탄압했다. 73년부터 10년간 일한 인명진 전 총무(갈릴리교회 목사)는 긴급조치 1호 위반과 YH사건, 김대중내란예비음모사건 등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네 번이나 구속됐다. 1980년에는 선교회에 드나든 노동자들을 직장에서 해고하고, 재취업을 금지시키기 위한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도산(도시산업선교)가 들어서면 도산(倒産)한다’는 식으로 보도하자 총회에도 선교회를 해체하자는 건의가 수없이 올라왔다.
인 전 총무는 “당시 정부 탄압보다도 교계 내 비판이 견디기 힘들었다”면서 “우리가 한 것은 노동운동도, 정치운동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운동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손 총무는 기념비에 새겨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눅 4:18)이라는 성구를 가리키며 “선배들은 가장 가난하고 어려웠던 사람들 가슴 속으로 뛰어든, 예수님을 따르는 사역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가 현재로=1990년대 들어 노동조합이 조직화, 전문화되면서 노동자 권리에 관한 선교회의 사역은 점차 축소됐다.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실직자, 노숙인을 돌보는 사역을 시작했고 지금은 ‘햇살보금자리’라는 이름으로 24시간노숙인상담보호센터로 발전했다. 이밖에도 생활협동조합 ‘다람쥐회’, 교육공동체 등 협동운동도 계속 진행중이다.
2001년에는 ‘아시아 URM 디아코니아 훈련원’을 개설했다. 아시아의 선교 일꾼들을 불러 선교회에서 2~3주 동안 한국의 산업선교 역사와 지구화, 환경 등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다. 손 총무는 “한국의 1970~1980년대 노동 상황이 아시아 다른 나라들에서는 현재진행형”이라며 “선교회의 지난 역사에서 비전을 찾는 사람들을 볼 때면 과거가 다시 현재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산업선교 본연의 관심도 놓은 것은 아니다. 이날 감사예배 때 발표한 ‘2010년 영등포산업선교회 사명 선언’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사역 방향을 제시했다.
1983~1990년 총무를 지낸 이근복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장)는 “총회의 이번 기독교사적 지정은 교회가 빈곤과 사회적 고통의 문제에 뛰어들어 함께 아파하고 일하는 사명을 인정하고 높여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요즘처럼 한국 교회의 위상이 위협받는 때에 교회들에 이 사명을 제시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영등포산업선교회 연혁>
1957년 예장 총회 선교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산업전도’ 결의
1958년 경기노회 영등포지구 산업전도회 창립
1965년 공장 내 ‘평신도 산업전도 지도자 훈련’ 시작
1968년 ‘산업전도’를 ‘산업선교’로 전환 결의
1969년 신용조합 시작
1977년 선교회 내 노동교회 창립
1978년 정부 탄압으로 신용조합 해산. 다람쥐회 창립
1979년 현재 자리에 산업선교회관 건립
1983년 노동교회 성문밖교회로 개칭, 한울안운동 시작
2000년 햇살보금자리 개소
2001년 아시아 URM 디아코니아훈련센터 개원
2006년 비정규직 여성 자아찾기·갈등해결 프로그램 시작
2009년 생활협동공동체협의회 설립
2010 영등포지역네트워크 목요밥상모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