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전범기업 만행 낱낱이 고발
입력 2010-11-25 22:17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 돌베개
일제시대 때 미쓰비시 중공업 등의 작업장에 강제 동원됐던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지난해 12월 일본 정부가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당시 약 1280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던 사실을 기억하는지. 이 결정에 충격을 받은 저자들(김호경 권기석 우성규)은 1940년대 일본 전범기업들의 만행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돌베개)는 태평양전쟁 시기 집단적·강제적으로 자행됐던 강제징용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역작이다.
얼떨결에 찾아온 해방과 정부 수립, 그 와중에 풀지 못한 숙제가 한둘인가. 이 책은 이미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는 강제징병과 종군위안부들의 문제보다 해묵은 채 그 자리에 있는 징용 문제를 제기했다. 강제동원조사위원회와 학계 등에 따르면 1940년대 당시 2000만명 정도였던 한반도 전체 인구 중에서 연인원 600만∼700만명이 강제 동원됐다. 피해 규모에서 말 그대로 ‘전 민족적인 수난’이었던 셈이다. 미쓰비시와 미쓰이 등 당시 상황에 대한 모든 증거와 정황을 갖고 있는 전범 기업들은 “우리는 법적·제도적으로 ‘전범’이라는 판정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일제 강제동원…’은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 일제 3대 재벌은 물론 후지코시, 도와홀딩스 등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기업들의 범죄 실태도 파헤쳤다. 참혹하리만큼 반인권적이었던 강제노동의 실상과 이들 기업의 관심 밖이었던 사망자들의 유골, 아직까지 체불된 임금 등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범 국가였던 독일의 사례와,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끝내 승리를 거둔 중국인 피해자들의 모습도 다뤘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나가사키와 홋카이도 등 일본 국내뿐 아니라 사할린의 탄광에까지 끌려가야 했던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5월 저자들이 사할린에서 만난 김윤덕 할아버지도 경북 경산군 하양면에서 자라 사할린 탄광에서 일했다. 전후 사할린이 소련의 영토가 되는 바람에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 김 할아버지는 뒤늦게 한국에서 자신이 사망처리된 것을 알고 바로잡아 보려고 애쓰지만 “너무 오래돼 할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다. 사할린이냐 남양군도냐는 눈곱만한 선택의 자유가 있던 사람들 중 남양군도를 택한 이들은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저자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침묵으로 채워진 60여년 후의 현장을 찾아 발굴해낸 통한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생존자들은 속절없이 나이를 먹어가고 시간은 완전히 기업의 편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분노하는 우리들, 김정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 할머니는 1945년 근로정신대로 일본에 건너가 도야마 현 후지코시 공장에서 8개월간 일했다. “할머니의 한은 후지코시 공장에서 일한 그 자체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 잠깐 재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중략) 김정주 할머니는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을 하고 왔다는 이유로 결혼에 실패했다”(180쪽) 남편에 학대받고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던 일생이었다. 김 할머니뿐 아니라 다른 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들도 평생 일본군위안부로 오인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을 상대로 한 재판에 참석해 이름조차 밝히길 꺼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이 전무했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학대와 무지. 그로 인해 이들이 짊어져야 했던 고통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한국인들의 몫이다.
560쪽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과 무거운 주제 때문에 책을 집어 들기가 꺼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펼쳐 읽더라도, 디스토피아와도 같은 세계가 섬광처럼 번뜩여 쉬이 책장을 덮기 어렵다. 우리가 잊었는데 다시 누가 기억할 것인가. 프리모 레비를 인용하여 저자들은 말한다. “과거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10쪽)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