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때 40여 차례 현해탄 건너 ‘조선 체제안정’ 외교력 펼쳤다

입력 2010-11-25 21:16


‘조선 최고의 외교관 이예’/박현모·이현모 外/서해문집

햇볕이 작렬하던 지난 8월 9일. 여객선으로 귀국길에 올랐던 박현모(45)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실장은 현해탄의 거센 파도에 깜짝 놀랐다. 맑은 날씨인데도 바닷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험했다. 박 실장은 그제서야 현해탄(玄海灘·가물가물하게 깊은 바다 여울)의 참뜻을 이해했다. ‘이리 험한 길을 돛단배를 타고 40여 차례나 건넜단 말인가.’ 박 실장은 새삼 ‘갓 쓴 조선 외교관’의 목숨을 건 용기에 탄복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떠올린 인물은 바로 이예(李藝·1373∼1445·사진)였다.

이예는 사대교린 외교정책으로 동북아 평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외교관이다. 업적으로 따지면 조선의 최고의 외교관으로 꼽힐 만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7명의 역사학자와 외교관 등이 각종 사료를 추적해 이예의 숨겨진 활약상을 복원했다.

‘조선 최고의 외교관 이예’는 중국 본토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할 때 한반도의 정치체제가 상대적인 안정을 누리고 장기간 지속될 수 있던 이유를 분석하면서 시작한다. 자칫 치명적일 수 있는 불리한 지리적 위치가 실제로는 유리하게 작용했던 데에는 실용외교가 큰 역할을 했는데, 그 외교 정책의 정점에 이예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방 아전인 기관(記官)이었던 이예가 외교관으로 발탁되는 과정은 드라마보다도 극적이다. 이명훈(59)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가 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예의 졸기(卒記)를 바탕으로 풀어쓴 ‘이예, 오늘에 되살리다’ 편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이예가 24살 되던 해(1396년) 울산군수 이은이 왜구에 납치됐다. 여러 아전들은 도망쳤지만 이예는 왜선에 숨어들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이예가 아전으로서 깍듯이 군수를 모시자 왜구들은 ‘진정한 조선의 관리’라며 감동하고 두 사람을 죽이려던 계획을 거뒀다. 이예의 충절을 가상히 여긴 조정은 그에게 벼슬을 제수해 중인 신분을 면하고 사대부로 높여주었다.”(157∼158쪽)

1400년 외교관이 된 이예는 1443년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회례사, 통신사 등의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그는 왜구에게 끌려간 조선 백성을 667명이나 구해오는데, 이는 이예 자신이 8살 때 어머니를 왜구에게 납치당하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경진년(1400년)에 조정에 청해 일본의 삼도(三島)에 들어가 어머니를 찾았는데, 집집마다 수색하였으나 마침내 찾지 못했다.”(이예 졸기 중)

이예는 강력한 국방과 화목한 교린이라는 대일 외교노선을 세종과 공유하며 조선 초기 외교사를 썼다. 세종은 험하고 까다로운 일을 회피하는 문반 관료 대신 이예를 대일 외교전문가로 꾸준히 중용했다. 1426년 세종은 당시 54세였던 이예를 일본에 보내면서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니 귀찮다 생각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박병련(58)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세종 외교의 실천자’ 편에서 세종과 이예의 신의와 충절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설명한다. 세종은 이예 부하들이 횡령 등의 잘못을 저질러 이예가 처벌될 위기에 놓일 때마다 그를 감싼다. 왕의 믿음에 이예는 71세의 고령에도 대마도로 가는 사절에 자원한다. 지금 나이로 치면 구십을 넘겼을 노구를 이끌고 험지로 떠난 것이다. 세종은 감복해 의복 일곱 벌과 사모를 하사했다.

일본의 고교 교사인 나카다 미노루(50)씨는 ‘조선 초기 대일 외교와 이예’ 편에서 이예를 ‘완벽한 조일외교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찬사에 가까운 평가를 내렸다. 책 말미 담긴 이예의 행적을 추적한 역사기행은 유종현 전 주(駐)세네갈 대사가 집필했다.

그러나 아전 출신인 이예는 정치적으로 불행했다. 모함에 취약했고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일본에 사신으로 자주 떠나는 바람에 국내 체류기간이 짧은 것이 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일본에 사신으로 간 기간을 1회당 평균 6개월로 잡는다면 줄잡아 20여년 정도를 바다와 일본 땅에서 체류한 셈이다. 이예는 사망 후 바로 시호를 받지 못했고 460여년이 지난 1910년에서야 조정으로부터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이명훈 교수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예와 함께 1910년에 시호를 받은 인물 중에는 정약용, 박지원, 남이장군이 있다. 이들에게 서둘러 시호를 내린 것은, 어쩌면 나라가 망하기 전 조선왕조가 이들에게 지고 있던 마음의 빚을 청산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179쪽)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다면 다소 읽기 까다로울 수 있지만 우리에게도 이처럼 걸출한 외교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이 교수는 책에서 “이예의 역사가 일본의 가해자 콤플렉스와 한국의 피해자 콤플렉스를 함께 치유하는 처방이 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이런 바람이 통했을까. 외교통상부는 이예가 조선으로부터 시호를 받은 지 정확히 100년이 지난 올해 이예를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