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 전 인권위 정책과장 “마태복음 25장 40절이 바로 인권”
입력 2010-11-24 17:57
‘현병철 위원장님. 저는 얼마 전 국가인권위를 자진퇴직한 직원입니다. 다섯 달만 더 채우면 20년 근속으로 공무원연금 대상자로서 노후가 보장되는 자리였지요. 식솔을 책임져야 할 제가 ‘철밥통’을 스스로 걷어찬 이유는….’
인권위 1세대 김형완(50) 전 인권정책과장이 무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낯이 뜨거워서였다. 고3 수험생이 되는 아들과 자신만 바라보며 살뜰하게 살림하는 처에게 어찌 보면 무책임한 일이다. 김씨는 지난 9월 3일 사표를 던졌다. “권력에 아부하는 듯한 행태를 보이는 것에 인권위의 한 구성원으로서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반이 흘렀다. ‘백수’가 된 김씨는 어찌됐건 매일 경기도 일산 집을 나와 서울 어디론가 출퇴근한다. 서울 통인동의 참여연대 사무실이다. 그가 협동사무처장으로 한때 몸담았던 직장이다. 전 직장은 그의 딱한 사정을 살펴 임시 거처를 마련해줬다. 참여연대 3층 임원실 맞은편 휑한 책상. 22일 그는 그 책상 위에 노트북을 폈고 인권위 자료들을 하나 둘 꺼내어 놓았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성공회대에서 강의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습니다. 올해 1학기부터 학부생 대상으로 ‘인권과 시민사회’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3시간 강의입니다. 참여연대에서 임시 공간을 내줘 이렇게 나와 있고요.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년 11월 25일 설립 10주년입니다. 10년사를 내야 할 텐데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정사(正史)를 내기 힘든 상황이라고 판단돼서 안에 있던 사람으로서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10년사 자료집을 내려고요.”
-생계문제는요.
“대책이 없죠. 저는 내핍을 겪으면 먹고사는 일은 어떻게 되지 않겠나 싶고요. 25년 만의 첫 휴식이라 안식월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막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막노동이라도 해야죠. 살아야 되니까요.”
-왜 그만두셨습니까.
“인권위에서 일하게 된 게 제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을 염원하는 국민들이 일종의 ‘파송’을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해 왔습니다. 아주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인데요. 공무원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혈세를 받아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국가인권위원회 공직자라면 국민의 인권 상황이 열악해지거나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자기 역할을 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명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국민의 혈세를 받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죠. 외부의 압력이나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원장 스스로가 권력의 눈치를 봤습니다. 독립성을 지켜야 할 인권위의 한 구성원으로서 모욕감과 수치감을 느꼈죠.”
-인권위의 마지막 남은 1세대, 인권위 산파라고 불렸습니다. 만류는 없었습니까.
“만류가 많았지요. 인권위 직원, 인권위원인 교수, 변호사 등 직간접으로 연관된 분들까지. 안경환 위원장(4대 위원장으로 중도 사퇴)께서는 무려 네 번이나 만나자고 연락해서 만류했습니다. 또 김창국 초대 위원장, 전 상임위원들, 이분들께는 제 마음이 정리되고 난 다음에 의논의 형식을 빌려 말씀을 간곡하게 드렸습니다. 한결같이 다 반대했습니다. 가족도 반대했지요.”
김씨는 2001년 국가인권위 설립기획단부터 시작해 인권위에서 9년간 일한 인물이다. 김씨는 인권위에 합류하기 전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다. 당시 독일 정부 장학금을 받고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비정부기구 간 공적개발원조(ODA) 정책개발 전공 석·박사 통합과정(브레멘대 개설)을 밟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온 건가요.
“자인했다시피 인권문제에 대해서 아는 바 없다고 한 분이 위원장으로 오셨습니다. 그것까지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국가인권기구의 사명과 인권에 대한 기본 개념을 알고 기구의 독립적 역할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사퇴를 종용하고 있음에도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대통령으로부터 자신의 어떤 자리를 보장받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국가인권기구 수장으로 독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데.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할 게 아니라 인권위원 후선에 의해 선출돼야 합니다. 유엔인권이사회가 프랭크 라뤼 표현의자유 특별보고관을 대한민국에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한국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인권위원회는 인권위를 현 A등급에서 B등급으로 강등할 것을 요청했고요. 그 경우 유엔 체제에서 공식적으로 멤버십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발언권이 사라지고 옵서버로 전환되지요.”
-인권위에서 보람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럼요. 인권위에서 일하는 동안 마음 놓고 휴가를 다녀온 적이 없습니다. 일하는 것 자체가 보람차고 행복했어요. 때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부딪히는 등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국민의 인권보호를 위한 호민관 역할을 했기에 굉장한 자부심 같은 걸 느꼈습니다. 검찰 수사과정에서 피의자 사망사건이 발생해 검찰의 밤샘 수사관행이 없어졌다거나 경찰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임의동행 긴급체포를 남발하는 사례 등이 시정된 점, 구금시설 수용자들의 인권 문제는 우리사회 사각지대였는데 인권위가 방문조사나 직권조사 통해 상당부분 개선했다는 점, 장애인이나 노약자 아동 등 사회 취약계층 보호시설의 운영이 인권 친화적으로 개선되는 점 등 총론적 측면에서 굉장히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국민들이 이제는 반 농담 식으로 ‘너 그러면 인권위원회에 진정 당한다’는 말을 할 정도니까. 인권위가 우리 사회 인권 감수성 진작에 큰 기여를 한 거죠.”
-인권위에 가기 전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저는 입법 사법 행정공무원, 비정부기구(NGO) 경험까지 다 해본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국회공무원 생활을 10년 했고요. 참여연대에서도 일했습니다. 주로 권력 감시 운동이라든지 정치관계법 개선, 사법비리 고발, 부패방지법 제정 운동을 했습니다. 조폐공사 파업유도 특검(우리나라 최초 특별검사) 때는 특별수사관으로 참여했습니다. 참여연대에서 5년 일하다 독일로 유학갔습니다.”
-진보주의자인가요.
“상당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이죠. 보수적 자유주의자는 자존감이라든지 양심의 요구 이런 것들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제게는 이념보다 원칙이나 상식이 중요합니다. 저는 진보주의자 또는 운동권 이렇게 스스로를 규정하거나 분류되는 것에 대해서 분에 넘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색깔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사회에 좌파 우파 얘기가 있습니다만 우리 사회가 발전하려면 우파가 건강하게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선결요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민주주의와 인권을 추구하면 모조리 좌파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야말로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 아닌가요. 좌파가 좌파답지 못하고 우파가 우파답지 못한 형국이 우리 사회 아닐까요.”
-신학을 공부하셨어요.
“네. 한신대 신학과 81학번입니다. 다른 학교를 다니다 중퇴해서 재입학했습니다. 그 당시 어린 마음에 좋은 학교 나쁜 학교 기준이 학생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냐 안 하느냐였는데요. 서울대는 갈 수가 없고 서울대 다음으로 데모 잘하는 학교를 보니 한신대였어요(웃음). 제가 중학교 때 세례 받은 개신교인입니다. 보수적인 예수교장로회 합동 측 교회를 다녔고요. 어머님께서 독실한 크리스천이십니다. 세례교인이긴 했지만 전공으로 신학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한신대라는 개방적 신학 학풍이 저로 하여금 종교적 신심 같은 걸 새롭게 만들어 주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걸어온 길의 중심에 신앙이 있습니까.
“지금도 저희 집에 표구해서 걸어놓은 것이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 일종의 가훈입니다. 인권의 성서적 의미이기도 하겠고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 겁니까.
“인권정책연구소를 만들어야죠. 우리나라에는 민간 인권연구소가 없습니다. 아름다운재단에 구두제안을 했고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3∼4명의 전문가와 함께 시작하려고 해요. 인권위와 정책 경쟁을 할 겁니다. 국제인권기구와 연계해서 정보의 터미널 역할도 해야지요.
-인권위는 어떻게 될까요.
“잘 돼야죠.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고 인권위원장 스스로 지혜로운 처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인권 가치에 대한 이해 부족, 기본적인 철학 부재에서 비롯된 사태인 만큼 시정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죠. 국격, 품격 있는 나라의 핵심은 인권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사태는
이명박 대통령 정부 출범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만들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유엔의 ‘파리원칙’에 따르면 국가인권기구는 국제인권 규범의 국내적 이행을 목표로 설립되는 독립 기구다.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에 인수위는 계획을 바꿨다. 그러나 직원 21% 감축에 안경환 위원장이 조기 사퇴했고, 2009년 7월 임명된 신임 현병철 위원장(전 한양대 법대 교수·한양사이버대 학장)은 인권 분야 경험이 전무한 무자격 위원장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현 위원장 취임 이후 인권위는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인권사안에 종종 침묵했다.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과 박원순 변호사의 국가 상대 소송, 용산참사, 야간시위 위헌 법률심판 제청건, 양천서 고문사건, MBC PD수첩 사건 등은 다뤄지지 않거나 부결됐다. 위원장의 국가보안법 옹호 발언, 인권위 행정부 소속 발언 등도 구설에 올랐다.
인권위 설립 구성원인 김형완 전 인권정책과장을 비롯해 핵심 멤버들이 인권위 독립성 훼손 등을 이유로 줄줄이 인권위를 떠났다. 차관급 상임위원 3명 중 2명이 사퇴했고, 인권위 위촉 전문·자문·상담위원 160명 중 61명이 집단 사퇴했다. 전국 223개 시민사회단체는 현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인권시민단체 대책회의를 조직했다.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은 인권위 사태와 관련해 우려의 메시지도 전달했다.
현 위원장은 지난 16일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서한에서 “흔들림 없이 업무를 추진하겠다”며 사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글 이경선 기자 ·사진 홍해인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