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갈색 추억 속으로… 만추에 걷는 지리산 둘레길 제8코스

입력 2010-11-24 21:25


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이인로 등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지리산 청학동은 어디쯤일까?

산청군 단성면의 운리 원정마을에서 출발하는 지리산 둘레길 제8코스가 화려한 원색에서 은은한 파스텔 톤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지리산 둘레길 여느 구간처럼 12.6㎞ 길이의 제8코스도 마을길과 임도, 그리고 숲길로 이루어졌지만 낙엽이 발목 깊이로 쌓인 만추의 숲길 정취는 지금까지 선보인 어느 둘레길보다 시적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원정마을의 아침은 순백의 세상. 황소가 되새김질을 할 때마다 나오는 허연 입김과 손바닥만한 들녘의 벼 그루터기에 내려앉은 하얀 서리, 그리고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는 억새꽃이 어우러져 만추의 고향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동네를 가로지른 마을길은 백운산(515m) 북서자락을 오르는 운리∼백운 임도와 연결된다. 허물어진 돌담을 배경으로 누렇게 탈색한 감국의 희미한 국향과 길섶을 수놓은 어린 황금측백나무가 길안내에 나섰다. 비포장 임도가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원두막 쉼터와 화장실이 때맞춰 마중을 나온다.

원두막에서 호흡을 고른 둘레길은 이내 숲길로 접어든다. 참나무 군락지인 숲은 낙엽천국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들이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며 갈색추억을 노래한다. 시몬의 낙엽 밟는 소리가 이처럼 낭만적이었을까. 울긋불긋한 차림의 둘레꾼들이 만추의 산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낙엽을 벗삼아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빨려든다.

산비탈을 에두르는 숲길이 드디어 백운계곡을 만난다. 웅석봉 줄기에서 흘러내리는 백운계곡은 남명 조식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3번이나 찾아 삼유동으로도 불린다. 낙엽이 둥둥 떠다니는 에메랄드빛 계곡에는 남명 선생이 지팡이를 놓고 쉬었다는 남명선생장구지소를 비롯해 절경들이 두루마리처럼 펼쳐진다. 지리산 기행문인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을 남길 정도로 지리산을 사랑한 남명 선생은 노년에 백운계곡의 아름다운 소(沼)와 천석(泉石)에 일일이 이름을 지어준다.

백운계곡에서 휴식을 취한 둘레길은 다시 숲길을 오른다. 그리고 산죽이 무성한 해발 800m 지점에서 제법 널찍한 평지를 만난다. 이름 없는 평지는 임걸룡이라는 산적의 은거지. 덕산에서 활동하던 임걸룡은 탐관오리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민초들에게 나눠준 의적으로 부하가 100여명이 넘자 세인의 눈을 피해 이곳에 산채를 마련하고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백두대간 중에서도 정령치∼만복대∼노고단∼반야봉∼삼도봉∼장터목∼천왕봉∼왕등재∼웅석봉∼수양산∼시무산∼사리마을에 이르는 99㎞를 태극능선이라고 부른다. 백두대간 지리산 구간을 연결하는 능선이 태극 모양으로 산악인들에게는 꿈의 종주길로 꼽힌다. 임걸룡의 산채는 바로 태극능선 웅석봉과 수양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산 산봉우리를 잇는 태극능선에서도 백운계곡 일대는 빨치산과 토벌대의 전투가 치열했던 곳 중 하나.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던 1948년부터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이 지리산 내원골에서 체포되던 1963년까지 지리산에서는 전투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래서 산청 사람들은 한국전쟁이 3년이 아니라 16년이라고 말한다.

“제가 어렸을 적에 산청에는 아버지 없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빨치산의 부역자로 몰려 죽고 토벌대를 돕다 죽었기 때문이지요. 이를 두고 산청에서는 세상바람에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재근 산청군수의 말이다. 좌익과 우익의 개념조차 모르던 순진무구한 산골 사람들이 지리산에 불어 닥친 이념바람에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지리산 둘레길 제8코스는 마근담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만난다. 마금대미 혹은 마근대미로 불리는 마근담(痲根淡)은 가파른 감투봉(768m)이 담처럼 막아서서 붙여진 이름. 본래 ‘막은담’이었으나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마근담으로 변했다.

줄곧 내리막인 마근담 계곡길에는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홍시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시천면 일대는 곶감 생산지로 유명한 곳. 사리마을에서 중산리계곡에 이르는 도로변 덕장에는 껍질을 벗긴 주홍빛감이 해맑은 가을햇살에 시나브로 곶감으로 익어가고 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해 당도가 높은 산청 곶감은 고종황제에게 진상을 했을 정도. 연초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재근 산청군수로부터 산청곶감을 선물 받고 감사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지리산 둘레길 제8코스는 마근담 계곡이 덕천강과 만나는 시천면 사리마을에서 막을 내린다. 사리마을의 산천재(山天齋)는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평생 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던 유서 깊은 곳으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 산천재 앞뜰에는 남명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고매화 한 그루가 고고한 기품을 자랑한다. 남명매로 명명된 고매화는 수령 450년이 넘었지만 해마다 봄에는 하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다.

사리마을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단성으로 나오다보면 ‘입덕문(入德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를 만난다. 입덕문은 본래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석문으로 이곳을 통과해야 사리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명 선생이 이 석문을 입덕문으로 명명하고 제자인 이제신이 석문에 입덕문이라는 글자를 새겼으나 20번 국도 공사로 석문이 사라지자 각자만 떼어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신라의 최치원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을 유람했다. 남명 선생도 예외가 아니다. 지리산을 19번이나 오른 남명 선생은 시천 일대를 세 번이나 답사한 후 합천에서 사리마을로 이주했다. 혹자는 마음의 이상향을 찾아 하동 청암면 묵계리에 마을을 일구고 청학동이라고 하지만 남명 선생에게는 석문 속의 세상인 사리마을이 지리산 청학동이 아니었을까.

산청=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