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선 약사의 미아리서신] 팔순 ‘시래기 할머니’의 한글 공부
입력 2010-11-24 17:51
요즘은 유난히 부고 소식을 많이 듣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면을 갖는 좋은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헤어짐과 그리고 홀로 서야 한다는 현실에 자식 된 도리로서 가슴이 아파짐은 숨길 수가 없나봅니다.
오전 11시면 늘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서시는 할머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약국에서 마주보이는 골목 가운데 할머님 집이 있고, 나가시는 길은 약국 앞 큰 길이라 천천히 걸어오시면서 힐끗 약국 안을 보고는 약국이 좀 한가해 보이면 할머님은 문을 열고 들어오십니다. “잘 잤어. 약사양반.”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말을 건네시곤 의자에 앉으십니다. 여든을 훨씬 넘기신 할머님은 큼지막한 배낭과 비닐봉지 몇 개를 들고 나가십니다. 배낭은 동네 사회복지관에서 나누어 주는 점심도시락을 넣을 가방이요, 비닐봉지는 시장에서 버려지는 배추 우거지가 담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모아진 배추 우거지는 맛깔스러운 김치로 다시 태어나고, 가끔은 제 밥상에 오르기도 하였지요. 봄이 오면 비닐봉지에는 씀바귀나 쑥으로 가득 찹니다. 할머니 덕분에 구수한 쑥국이나 쌉싸래한 씀바귀나물을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흔하게 버려지는 가방도 할머님의 손으로 깨끗이 빨고 꿰매 예쁜 가방으로 화사하게 달라지는 모습을 종종 보았지요. 폐휴지나 빈 병을 모으기도 하였던 할머님은 그 어떤 것도 그냥 버리시지 않고 나름의 쓸모가 있도록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함께 사는 손자들의 용돈이라도 벌어보신다고 시작한 일이 하다 보니 즐겁고 재미가 있어 수십 년째 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엔 부끄러워서 아무리 쓸 만한 물건이 있어도 허리를 굽혀 물건 주울 엄두를 내지 못 했었지. 근데 어느 저녁 때 주택 뒷담 아래 아주 좋은 가방이 버려져 있는 거야. 그래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냅다 주었지. 얼마나 가슴이 쿵쿵거리던지 심장 터져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 그게 벌써 한 이십 년 전이네. 호호호.”
할머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루 세끼 밥도 이어 붙일 수 없는 집안에 태어나서 아주 어린나이에 시집이라는 걸 갔지. 복 없는 년의 팔자는 어디가도 마찬가지라고.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살림이었지, 기가 막히더만. 그래도 살아야지 어쩌겠어. 그래서 살림을 시작했지. 아들 하나 낳고 그 다음해 딸 하나 그렇게 남매를 두었어. 어린 남매는 밥 달라고 보채지, 늙은 서방은 골골거리지, 그렇게 악다구니 같은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엔 서방 먼저 보내고 다시 시집을 갔어.”
할머님의 지나온 인생사는 한 편 소설 같았습니다. 눈물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팔십 년 넘게 살아오신 당신의 삶 속에 가장 큰 회한은 글을 읽고 쓸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것도 할머님의 애달팠던 인생사 끝에 어렵게 입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쓰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님과 함께 한글 공부를 시작하였지요. 가장 쓰고 싶은 글자는 ‘하나님 고맙습니다’와 할머님 성함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당신 손으로 꼭 당신의 이름을 쓰고 싶었노라고 이제 그 꿈을 푸니 여한이 없노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님의 말라붙은 입술은 부들부들 떨고 계셨습니다.
할머님의 한글 수업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평생 글을 써보신 적이 없는 분이시라서 가로 세로 줄을 그리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얇은 노트 한 권이 거의 끝나가는 데도 할머니의 한글 수업은 진도가 나가지 못했습니다.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늘 미안해 하셨으나 그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폐지를 줍고, 배추 시래기를 주워 모으는 일은 팔순 노인에게는 많이 고되고 힘든 일일 것입니다. 할머님은 전기요금이 아까워 전등도 켜지 않은 컴컴한 방에서 잠에 취해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았기에 시간을 내어 따로 연필을 잡고 쓰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할머님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몇 쪽의 노트를 채워 오셨습니다.
꼬불꼬불 하던 글씨가 제법 모양새를 갖춰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오롯이 할머님 자신의 힘으로 글씨를 써 오셨습니다. 오, 하나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