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북병원 결핵환자 사연들…가난이 병 되다

입력 2010-11-24 18:41


꼭 한 달 후면 크리스마스다. 이맘때면 결핵환자를 돕기 위한 크리스마스 실이 등장한다. 실 판매 및 구입은 크리스천의 대표적인 사랑 실천이었다. 실 판매로 얻는 수익은 결핵환자를 위해 썼다. 결핵은 결핵균에 의한 전염병이다. 공기를 통해 전파된다. 이를 들이마시면 폐 속에 들어가 증식한다. 결핵균에 감염된다고 모두 결핵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잘 먹고 잘 쉬는 사람은 해가 없다. 못 먹고 못 쉬는 사람만 발병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결핵에 많이 걸린다. ‘가난병’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수도권 유일의 폐결핵 전문치료기관인 서울 역촌동 서북병원. 이곳에는 가난병을 앓고 있는 180여명이 입원하고 있다. 지난 22일 병원을 찾았다.

내 배 부르고 내 등 따시면 먹지 못해 병까지 걸리는 사람이 있나 싶은 게 우리다. 요즘 약도 좋아졌다는데 결핵이 뭐 대수냐고 생각하기 쉽다.

국내 결핵환자는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실제 급격히 줄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해도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다. 보통 약만 제때 꾸준히 먹으면 결핵은 완치된다. 그러나 가난은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못 먹으면 결핵균은 다시 폐에 똬리를 틀고, 폐를 죽이고 사람을 죽인다.

라면으로 끼니 때우던 엄마와 아들

김지우(23·가명)씨는 슈퍼결핵에 걸렸다. 모든 종류의 치료약을 먹었지만 낫지 않고 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병이 악화되지 않도록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머니도 슈퍼결핵을 앓고 2007년 1월에 돌아가셨다.

김씨는 고2 때 폐결핵 판정을 받았다. 이혼한 엄마는 동생까지 세 식구의 생활을 책임졌다. 지하철 잡상인을 비롯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답은 없었다. 월세 전기세 수도세 등 꼭 필요한 것만 내도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먹는 게 부실했다.

고3 때 엄마가 쓰러졌다. 이후 화장실 갈 때를 빼곤 거의 누워 지냈다. 가래에는 피가 섞여 나왔다. 엄마는 결핵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김씨는 알았다. 1년 전부터 자신이 먹는 약을 엄마도 먹고 있었다.

이후 김씨 가족은 정부가 주는 기초생활수급비로 살았다. 삶은 더 빠듯했다. 쌀이 없어 라면을 먹었다. 김씨가 한 솥에 라면을 끓이면 엄마와 동생이 함께 먹었다. 전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막내가 결핵에 안걸린 게 기적이었다.

엄마 상태는 더 악화됐다. 2006년 이모가 서북병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씨는 서둘러 서북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슈퍼결핵이었다. 약이 없었다. 그러나 김씨는 희망을 잃지 않고 엄마를 간호했다. 동생도 가끔 병원을 찾았다. 또래의 새엄마 아들과 싸운 날이면 쫓겨 온 것이지만.

김씨도 기침을 달고 살았다. 그날은 조금 심하다 싶더니 각혈을 했다. 진단은 슈퍼결핵이었다.

40년 가까이 외로운 삶

오신자(70·여)씨는 40년 가까이 혼자 살고 있다. 1973년 결핵에 걸리면서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남편은 사별했고 자녀들과 연락 끊어진 지 오래됐다. 정부 도움으로 근근이 살고 있다.

서북병원은 88년도에 처음 찾았다. 길에서 피를 쏟고 쓰러지자 행인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서북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2000년 꾸준한 치료로 결핵은 완치됐지만 병원비가 문제였다.

병원은 동사무소를 통해 자녀들을 찾아 나섰다. 전국 전산망을 통해 겨우 연락처를 알아냈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 없이 이제껏 살았다. 전화번호 알려주지 마라”고 신신당부했다.

오씨는 아들이 넷이다. 큰아들은 노숙인으로 살다 죽었다고 전해 들었다. 세 아들은 어딘가에 산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는 “자식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동안 정부가 매달 35만원씩 줬는데 이번에 28만원으로 깎았다고 했다. “새로 이사한 지역 동사무소에서 내가 자식이 있다는데… 내가 눈으로 보기를 했어, 밥을 한번 먹어봤어. 법이라는 데야 할 수 없지만.” 금세 풀이 죽은 오씨는 “자식 찾고 싶어도 병든 부모 짐밖에 더 되냐”며 말꼬리를 흐렸다.

한평생을 냉대 속에서

요즘 결핵환자는 2009년 기준 10만명당 80명 선이다. 65년만 해도 10만명당 5000명 선이었다. 서북병원의 모태인 시립순화병원 결핵환자진료소는 48년에 세워졌다. 초창기에는 병상 수가 800여개였다. 현재 서북병원은 500병상이다. 당시 진료소였던 것을 감안하면 병상이 얼마나 빼곡하게 들어찼는지 알 수 있다. 장티푸스 콜레라 환자까지 몰려 병원 복도는 야전침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당시 환자의 삶은 더 고단했다. 치료를 받고 목숨은 건졌지만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완치됐지만 결핵병력 때문에 사회복귀가 어려웠다. 가족도 외면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60년대 서북병원이 결핵전문병원으로 바뀌면서 전국에서 몰린 결핵환자들은 인근에 집단촌을 형성했다. 퇴원한 이들이 산에 움막을 쳤다. ‘결핵촌’이라 불린 이곳에 많을 때는 430여명이 살았다. 현재 이곳은 2004년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임대아파트가 들어섰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결핵환자 중에는 노숙인이 많다. 서북병원에 입원 중인 장남현(43·가명)씨도 노숙인이다. 10년간 노숙생활을 했다. 중간중간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지만 술값으로 썼다. 지난해 12월 입원했던 그는 병원치료를 잘 받았지만 퇴원 후에는 제때 약을 먹지 않았다. 약보다 술과 담배를 입에 먼저 댔다. 최근 상태가 악화돼 다시 입원했다.

노숙인 김진국(63)씨는 결핵 후유증인 호흡기 폐질환으로 입원하고 있다. 2002년 아내와 사별하고 2003년 사업이 부도나면서 노숙인이 됐다. 이들 노숙인에게 병원은 안식처다. 장씨는 “이곳 선생님들 없었으면 벌써 죽었지”라고, 김씨는 “시립이라 병실도 넓고 노숙보다 훨씬 낫지”라며 웃었다.

희망은 있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김지우씨는 전문대학에서 웹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결핵환자를 격려하기 위한 소모임에도 나간다. 그는 “저는 슈퍼결핵과 싸우고 있다”면서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오씨는 “김장철인데 집에도 못가고… 어서 나아야지요”라며 삶의 의지를 보였다.

아프고 가난한 이들의 마지막 보루

돕는 손길도 많다. 일단 서북병원이 60여년간 결핵환자 치료를 담당했다. 치료뿐만 아니라 이곳 간호사들은 간병인 역할까지 했다. 보호자들이 없어 환자 대소변 받는 것은 기본이었다. 2008년부터 독거노인 서비스를 확대해 보호자가 없으면 무료 간병인도 붙여준다. 김한선 병원장은 “결핵환자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다. 서북병원이 아프고 가난한 자들의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으로 최선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자원봉사자들도 많다. 노숙인 김씨는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으니까 좋은 사람 많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고 말했다. 알고 보면 크리스천들이다. 의사·간호사 자원 봉사단체인 ‘사랑나눔봉사동호회’ 회원 대부분이 기독인이다. 사비를 털어 김지우씨를 돕고 있는 담당의 서해숙 결핵과장은 서울 이화여대 내 이대교회에 출석한다. 서 과장은 “안타까운 사정을 들으면 돕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글 전병선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