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20) 케네디 피격에 최고의 문명 미국 ‘흔들’
입력 2010-11-24 18:08
1963년 11월 22일. 교인 심방을 마치고 차를 몰고 가던 중 라디오 뉴스에서 들려온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댈러스를 방문 중이던 케네디 대통령이 괴한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차를 세우고 인근 상점으로 뛰어갔다. 가게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몇 사람은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당시 미국은 20세기 최고의 문명과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차 있었다. 그런 미국에서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백주 대낮에 피격 사망했다는 것은 그동안의 사회 구조에 대한 믿음을 단번에 허물어트리는 사건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대중적 지지 속에서 패기 있게 국내외 문제를 잘 처리해 나가고 있었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철폐에도 적극적이었다. 흑인 인권운동이 점점 거세지는 것에는 대통령에 대한 기대도 한몫을 했다.
이후 미국 사회는 큰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젊은 세대의 충격은 기성세대에 대한 환멸과 국가 기관에 대한 불신으로 발전했다. 젊은이들은 기성문화와 규범에 대한 부정과 조롱으로 히피 운동을 키워갔고 교회마저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암살 사건은 나에게도 오랫동안 깊은 충격을 주었다. 내가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 올 때는 10년이면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8년이 다 된 지금 나는 어떤 길 위에 있는 것일까?”
여러 인종이 출석하는 서민적인 분위기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를 맡아 시무한 일이나 루이빌 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하며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한 것 모두 중요한 사역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해결치 못한 채 안고 있던 고민들, 현실의 모순에 대한 궁금증이 이때 확 부풀었다.
그 대답을 학문적 연구를 통해 찾아보고 싶다는 열망에 목회를 잠시 중단하고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여러 신학교에 원서를 넣은 결과 예일대 신학부에서 장학금과 입학을 허락받았다. 내가 택한 연구 주제는 ‘종교사회학’이었다.
64년 가을, 교회와 학교에 각각 1년간의 안식년 휴가를 신청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꼭 가셔야 합니까?” 하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흑인 인권운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여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해서 예일대가 위치한 뉴헤이븐으로 떠나게 됐다. 이때 나는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가정적으로는 더할 수 없이 안정적인 시기였다.
내가 낯선 미국 땅에서 담임목사로, 대학교 교목으로 무리 없이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이혜선 사모가 동역자의 역할을 헌신적으로 감당해 줬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나의 인연은 부모님 대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내의 부친 되시는 이장춘 장로님은 평양에서 이름난 사업가셨고 신앙이 좋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는 분이셨다. 그 댁도 51년 1·4 후퇴 때 월남해 말할 수 없는 고생 끝에 제주도까지 피란을 갔다가 부산으로, 서울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7명이나 되는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교육시키셨다.
나도 피란 내려와 해병대에 근무하며 그 댁이 남쪽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인연이 맺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55년 가을, 내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때에 연락이 왔다. 평양 서문밖교회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낸 김성환 집사님이셨다. 피란 내려와 남쪽에서 만난 우리 형제를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신 분이다. “대전 이 장로님 댁에 초대를 받았는데 같이 가자”는 말씀에 문득 설렘이 느껴졌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