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정태] ‘여성폭력추방의 날’과 일본
입력 2010-11-23 17:56
라파엘 트루히요는 카리브해 연안 섬나라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다. 육군사령관으로 있던 1930년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호라시오 바스케스 대통령을 추방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32년간 군림한 인물이다. 경제 근대화를 어느 정도 이루긴 했으나 일가를 공직에 앉히고 수많은 정적을 처형하는 등 철권통치를 폈다. 그러다 1961년 5월 정적의 총탄에 암살당하며 비극적인 생을 마쳤다.
트루히요 독재정권의 붕괴를 앞당긴 사건은 6개월 전 발생했다. 60년 11월 25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반체제 운동을 하던 미라벨가(家)의 세 자매가 살해됐다. 미네르바, 파트리아, 마리아 테레사 등 세 자매가 투옥된 남편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비밀요원들에게 암살된 것이다. 정권이 단순사고로 위장했지만 진상을 알게 된 도미니카 국민은 분노했다. 반독재 투쟁의 기폭제가 됐음은 물론이다.
20년이 흐른 81년 7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중남미 지역 여성운동가 회의가 열렸다. 미라벨 자매를 추모하고 여성 폭력 근절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촉구하기 위해 11월 25일을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로 선언했다. 이어 91년 미국 뉴저지주에 모인 세계 각국 여성운동가들은 11월 25일부터 세계인권선언일인 12월 10일까지 16일간을 여성폭력추방주간으로 정했다. 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유엔도 99년 12월 결의안을 채택하고 매년 11월 25일을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로 공식 지정한다.
우리나라도 이 주간을 맞아 각종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성희롱 등 약자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을 반대한다. 올해 여성가족부의 캠페인 테마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다. 아울러 우리에겐 한 맺힌 역사가 있다. 일제시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지금까지 접수된 위안부 피해자 234명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82명. 올해 들어서만 6명이 숨졌다.
고령이어서 언제 눈 감을지 모르는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이 시급하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내일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을 맞아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 서명(23일 현재 41만여명)을 일본 정부·의회에 전달한다. 오늘 출국하는 피해자 할머니 5명 등 정대협 대표단은 현지에서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는 집회도 연다. 약탈 문화재 반환 약속에 이어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전향적 조치가 나오길 촉구한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