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주리] 이층에서 본 거리

입력 2010-11-23 17:52


며칠 전 친구와 함께 서래마을에 있는 와인 바에 다녀왔다. 8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인기 그룹 ‘다섯 손가락’의 리더 이두헌이 운영하는 이곳에서 가냘픈 몸매의 서른 중반쯤 되었을 여인이 부르는 샹송과 남미 노래들을 들었다. 노래를 신청하면 즉석에서 불러주는 그녀의 모습은 작은 비둘기처럼 사랑스러웠다.

노래를 들으며 ‘다섯 손가락’이 부른 노래들에 관한 추억을 떠올렸다. 80년대 중반 뉴욕에 도착해 처음 얻은 스튜디오가 렉싱턴 에비뉴에 있는 피자가게 2층이었다. 낮에는 피자냄새가 하루 종일 피어오르고 밤에는 생쥐들이 눈앞의 과자를 가로 채가곤 했다. 가끔 이층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면, 어린 창녀가 알몸으로 털 코트를 두른 채 우리 집 문 앞에 기대어 서서 손님을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뉴욕의 겨울은 추웠다. 어느 추운 겨울밤 담요를 두르고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누군가 초인종을 울렸다. 아무도 올 리 없는 시간에 울린 초인종 소리는 3층에 살고 있는 유학생이 누른 것이었다. “밤중에 죄송합니다. 너무 잠이 오지 않아서요.” 그렇게 통성명을 한 그녀는 나보다 대여섯 살 적은, 눈이 커다랗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밤중에 찾아와 미안하다며 내민 선물이 ‘다섯 손가락’ 카세트 테이프였다.

불면증을 앓는 그녀는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는 2층 내 방문을 자주 두드렸다. 어느 날 그녀는 내 그림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언니 그림은 다섯 손가락이 부른 노래 ‘이층에서 본 거리’랑 분위기가 비슷해요.” 우리는 뉴욕 맨해튼의 32가에 처음 생긴 노래방에 가서 ‘이층에서 본 거리’를 찾았지만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날 서울의 노래방에 갔을 때, 한 후배가 ‘이층에서 본 거리’를 불렀다. 그 뒤 그 노래는 나의 애창곡 중 하나가 되었다. ‘수녀가 지나가는 그 길가에는 어릴 적 내 친구는 외면을 하고 길거리 약국에서 담배를 팔듯 세상은 평화롭게 갈 길을 가고 해묵은 습관처럼 아침이 오고 누군가 올 것 같은 아침이 오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유로 하루는 나른하게 흘러만 가고 구경만 하고 있는 아이가 있고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도 있고 안개가 피어나는 그 길가에는 해묵은 그리움이 다시 떠오네.이층에서 본 거리 평온한 거리였어… 안개만 자욱했어’

뉴욕의 그 피자집 2층에서 정말 나는 구경만 하고 있는 아이처럼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유로 한밤중에 찾아오는 3층에 사는 그녀가 기다려졌고, 우리 집 이층에서 내려다 본 거리는 내용은 다르지만 그 노래와 참 닮았었다.

수녀가 지나가는 그 길가에는 대신 어린 창녀가 털 코트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때로는 정말 안개만 자욱했다. 외로웠지만 행복했던 서른 살 시절, 이층에서 본 거리를 떠올리며 그 노래를 다시 듣는다. “언니 뭐해?” 하며 한밤중에 내 방 문을 두드리던 그녀의 안부가 궁금하다.

황주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