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화백 회고전 개막… “지친 세상에 희망을…” 팔순 화백의 쉼없는 붓질
입력 2010-11-23 17:31
지난 17일 팔순잔치를 가진 박서보 화백(사진)은 작업에 쏟는 열정이 아직도 팔팔하다. 미술계에 내리꽂는 쓴소리도 여전하다. 1931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나온 후 60년 넘게 활동했으니 이젠 좀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얘기라도 나오면 무슨 소리냐고 되받는다. 25일부터 내년 1월 20일까지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에서 여는 회고전에도 그는 붓질이 팍팍 살아나는 대작 등 50여점을 내놓았다.
박 화백은 1950년대 문화적 불모지였던 한국 미술에 추상미술을 소개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한국 엥포르멜(서정적 추상주의 경향) 운동에 앞장선 그의 작업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전기 묘법시대(1967∼1989년)는 ‘묘법(描法)’으로 잘 알려진 회화 연작 시기로 캔버스에 밝은 회색이나 미색의 물감을 바르고 연필을 이용해 그 위에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드로잉의 본질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두 번째 에스키스 드로잉(1996∼현재)은 일종의 건축적 밑그림에 해당하는 드로잉으로 작은 단위의 메모지를 만든 뒤 커다란 방안지(모눈종이)에 정교하게 수정하며 옮겨 그리는 방법으로 작업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석판으로 제작한 방안지 위에 연필과 수정액 펜으로 부분적인 첨삭을 가하면서 공간의 깊이와 넓이를 조정한다. 이 작품은 회화의 치밀성과 정교성, 완결성 등을 보여준다.
후기 묘법시대(1989∼현재)는 한지와 닥종이를 사용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닥종이를 겹겹이 화면에 올린 뒤 그 위에 물감을 얹어 종이를 적셔 다시 먹을 붓고 손가락이나 도구를 이용해 요철(凹凸) 등 흔적을 내는 것으로 쓰고 지우기, 바르고 긁어내기, 쌓고 덜어내기 등 평면의 다양한 변주를 드러낸다. 국제갤러리 본관과 신관 전체를 활용한 이번 전시에는 이 세 가지 작업을 골고루 선보인다.
밭이랑처럼 고랑 사이에 물감을 높게 쌓아올린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형태는 추상이지만 한강에 줄줄이 들어선 다리의 교각이라고 생각하고 그렸어요. 한국 발전의 원동력을 상징하지요. 제 그림이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면 좋겠습니다.”
동료 작가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요즘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림만 그릴 수 있기를 소망했다(02-735-8449).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