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성기철] 여의도 客土論
입력 2010-11-22 18:01
대한민국 국회가 처음 문을 연 것은 1948년 5월 31일. 198명의 제헌의원들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경복궁 내 중앙청에서 첫 회의를 열어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원을 선출함으로써 원 구성을 했다. 이후 2년 동안 중앙청은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함께 사용됐다.
북의 남침으로 국회도 피난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차 피난 때 대구와 부산에선 같은 이름의 문화극장이 잇따라 의사당 역할을 했다. 서울 수복으로 잠시 중앙청과 시민회관별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회의를 하던 국회는 1·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53년 환도 때까지 부산극장과 경남도청(무덕전)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헌정사의 오점인 발췌개헌이 이뤄진 것은 부산에서였다. 환도 후 국회는 시민회관별관을 대대적으로 개수해 명실상부한 의사당으로 꾸몄다. 태평로 의사당이라 명명된 이곳은 75년까지 한국정치의 중심이었다.
국회는 통일시대에 대비한 의사당을 짓기로 하고 영등포구 여의도 서편에 33만㎡(10만평) 넓이의 의사당 부지를 확보했다. 6년간의 대역사 끝에 본관을 완공해 75년 9월 태평로에서 이곳으로 이사했다. 본관 건물의 가운데는 밑지름 64m의 돔 형태 지붕으로 덮여 있는데, 이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게 하는 의회 민주정치의 상징이라고 한다.
국회의사당이 일찌감치 여의도에 터 잡았지만 여의도 정치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87년 여의도에 입성하고, 3년 뒤 3당 통합된 민주자유당이 국회 앞에 당사를 마련하면서부터다. 88년 이후 직선 대통령들이 빠짐없이 국회의사당에서 취임식을 갖게 됨으로써 여의도 정치의 상징성은 더욱 커졌다.
정권 실세인 이재오 특임장관이 자신의 트위터에 “여의도 정치의 지력(地力)이 다한 것 같다. 이젠 객토(客土)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혀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객토란 논밭의 토질을 개량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좋은 흙을 가져와 섞는 것을 말한다. 얼핏 개헌이나 정계개편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대통령의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런 일은 대통령이나 특임장관이 깃발을 든다고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보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정파와 개인의 이익에 몰두하는 정치인들을 겨냥한 발언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국회의원들의 구시대적 행태를 바로잡도록 하는 정치개혁은 시급한 일이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