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조용래] 은행들 1997년 환란 허물 벗나
입력 2010-11-22 18:00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달러 결제자금이 바닥나 국제통화기금(IMF)에서 195억 달러의 긴급구제자금을 받고 대신 고금리·긴축 기조를 받아들였다. 그 여파로 숱한 기업들이 주저앉았고, 정부는 외자의 성격을 불문하고 유치에 혈안이었다.
정부는 금융시스템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공적자금을 금융권에 쏟아 부었다. 그 과정에서 은행원들의 3분의 1 가량이 일자리를 잃었다. 파산 은행은 말할 나위도 없고 공적자금이 투입돼 회생한 은행들에서도 구조조정이 거셌기 때문이다.
뉴브리지·론스타 택한 게 문제
위기에서 조금 벗어날 무렵 정부는 공적자금 투입은행의 민영화, 즉 공적자금 회수작업에 힘을 쏟았다. 그 틈새를 치고 들어온 것이 미국의 사모펀드 뉴브리지 캐피털과 론스타 펀드다. 뉴브리지는 1999년 옛 제일은행을, 론스타는 2003년 외환은행을 각각 인수했다.
공적자금을 신속히 회수하겠다는 정부의 의도를 간파한 뉴브리지는 공적자금이 10조원 넘게 들어간 제일은행을 겨우 5000억원(지분 51%)에 사들였다. 이어 뉴브리지는 2005년 제일은행을 스탠다드차터드은행에 재매각해 1조1800억원의 순익(매각 차익)을 올렸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순익을 올린 뉴브리지에 사람들은 아연했다. 이중과세협정을 앞세워 세금 한 푼 내지 않은 것에 대한 심정적인 반발도 컸다. 재주는 곰(공적자금)이 넘고 돈은 누가 챙겨간다더니 뉴브리지가 꼭 그랬다. 당시 뉴브리지는 한국인들의 반발을 의식한 듯 금융채무자 신용회복지원에 써달라며 자산관리공사와 중소기업연구원에 2000만 달러(204억원)를 기부했다. 씁쓸하기만 한 ‘껌값’ 기부다.
외국계 펀드의 성공사례는 우리 은행권에서 아직 진행 중이다. 하나은행의 외환은행 인수가 초읽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론스타가 보유하고 있는 외환은행 지분 51.02%에 대한 가격협상은 현재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시장에서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해 4조5000억∼5조원으로 예상한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인수자금 2조1500억원 중 99%를 지난 7년 동안의 배당금과 지분 일부 매각대금으로 이미 회수했다.
이번 외환은행 매각대금은 론스타의 순익인 셈이다. 외환은행엔 공적자금이 투입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되나 7년 만에 투자수익 5조원이라니 솔직히 좀 불쾌하다. 여기에 외환은행의 현대건설 지분 8.7%를 감안하면 론스타는 현대건설 매각과 함께 1조원 이상의 수익을 더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뉴브리지나 론스타와 관련된 우리의 참담함, 씁쓸함이 아니다. 그들만을 탓하는 것은 하늘에 침을 뱉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알짜기업을 헐값에 사들여 비싼 값에 팔아넘겨서 차익을 챙기는 투기자본을 탓하기보다 분별없이 뉴브리지나 론스타를 선택한 우리의 천박함을 탓해야 옳다.
외환위기 직후 정부는 외국자본에 국내 은행을 매각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선진적 금융기법의 도입’, ‘우리 은행의 선진화를 위한 자극’ 등으로 강조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은행권은 과연 선진화됐는가. 국내 은행 빅3만 보더라도 아직은 아니지 싶다.
은행권 지각변동 선진화 계기로
국민은행은 덩치에서만 앞을 달리고 있을 뿐 고비용·저효율의 대명사가 돼 있다. 우리은행은 공적자금 투입 후 이번에야 겨우 민영화를 앞두고 있지 않은가. 또 신한은행은 최고 경영자들의 이전투구로 여념이 없다. 업계 4위를 지켜왔던 하나은행은 최근 기업은행에까지 밀리는 상황에서 이를 만회하려고 외환은행 인수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래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은행권은 아직도 환란의 여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같다. 외환은행과 우리은행 매각을 앞두고 은행권의 지각변동이 주목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은행들이 명실공히 지난 환란과 결별하는 데 있다. 천박한 선택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