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는 무엇인가

입력 2010-11-22 17:48


(20) 한국에서의 교파 성립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에는 모두 그들 교파의 배경을 갖고 있었다. 들어온 시간대는 다르지만, 미국에서는 남·북 장로교와 남·북 감리교, 캐나다에서는 캐나다 장로교, 호주에서는 빅토리아주의 장로교, 영국에서는 성공회 등이 들어왔다. 일본에서는 한국인과 미국인이 성결교,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개인 선교사가 침례교, 이렇게 각각 입국하였다.

이들 교파는 선교사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교의 성공을 거두려고 서로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간혹 경쟁으로 비쳐지고 실제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890년 선교지역을 서로 예의를 갖추어 분할하는 정책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대개의 선교영역이 결정되었다. 황해도와 평안도, 경북은 북장로교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에, 경남은 호주 장로교에, 경기도 일부와 황해도 남부, 평안도 일부는 북감리교에, 충청도와 강원도, 경인지방은 남감리교에, 전라도는 남장로교에 각각 할당되었다. 그 이후 조금씩 변화가 있었지만 대개 이런 형태로 각각 선교활동을 하였다.

한데 1900년대 초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이 서울에서 모여 단일한 한국교회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때 재한복음주의선교공의회를 창설하고 그런 계획을 실천해 가도록 하였다. 한국 현지에서는 교파 차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교파라는 것이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겼던 것인데, 문화와 역사 및 민족이 하나인 한국에서 여러 교파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물론 선교사를 보낸 나라들에서는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런 계획의 실천을 중단해야 할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1907년에는 정미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제의 한국 지배가 현실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는 한국 통치를 가속화하면서 그들 통치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기독교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교회는 이런 단일교회의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그런 단일한 전국 조직은 일제의 타격대상으로 쉽게 잡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직 하나는 여러 조직보다 훨씬 쉽게 괴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공격 표적을 다초점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일제 경찰의 난시(亂視)를 촉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교파의 다양성을 가진 교회가 최소한도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실제로 정체(政體)와 교리 및 신앙정서가 각기 다른 대소 교파가 전국에 대거 병립하면 일제로서는 확실히 소모적인 계획과 방법을 시시각각 변경하며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교회의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생존이었다. 당시로서 한국교회를 교파교회로 분산시켜 생존케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국에서의 다양한 교파 정립은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비한 한국교회의 대단한 경륜이었다.

민경배 백석대학교 석좌교수